갈라디아서 3장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서 우리가 율법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에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자기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자기의 의를 쌓는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항상 감사하면서 예수님 만을 높여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아브라함
갈3: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 ‘언약’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데케'(διαθηκη)는 주로 ‘유언이나 유언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나 70인 역에서는 몇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 대분분 ‘언약’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 말이 ‘유언’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으나 본 절에서 ‘유언’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은 유언은 유언자가 죽어야 그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유언이 되려면 하나님의 죽으셔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죽으심을 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이 단어를 ‘유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바울은 본 절에서 사람 사이의 언약의 견고성(堅固性)을 예로 들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불변성(16절)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이 맺은 언약과 큰 차이가 있다. 창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 정황을 살펴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계약자들을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주권자로서 기필코 하신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히 6:13-15). 바울이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사람의 언약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신실성을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절대적으로 성취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 ‘자손’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페르마티'(σπερματι)는 복수형인 ‘스페르마신'(σπερμασιν)과 함께 집합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바울이 ‘오직 하나’라는 강조 문구를 덧붙인 것은 바울이 헬라어를 잘 몰랐다거나 바울 자신이 랍비적 논증 방식을 사용하여 랍비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득하려고 했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바울은 ‘스페르마티’를 집합적인 의미로 사용한 예도 있지만(롬 4:16-18;9:6-8), 본 구절에서는 단수의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궁극적인 메시야의 축복이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Boice).
곧 그리스도라 – 바울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로 끌어온다. 아브라함에게 제시된 언약은 당대의 육신적인 자손들이나 율법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본 절을 궤변적인 랍비적 논쟁 방법에 의한 삽입구로 간주하려고 한다(Howard, Cole). 그러나 본 절에서 바울이 분명하게 주장하는 바는 약속의 성취는 그리스도에게 집약되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갈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 – 이것은 출 12:40에 근거한 기간이다. 그러나 이 기간은 접근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된다. (1)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기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히브리어 본문을 기초로 한 번역 본들에서 나타나고있다(Boice). (2) 아브라함과 모세 사이의 기간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이는 헬라어 사본(LXX)에 근거한 견해이다(Hendriksen). (3) 아브라함의 언약이 확정된 야곱때로부터 시내산 율법을 주신 때까지의 기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견해는 (2)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야곱에게 와서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 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주어지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지났다는 사실이다(Lenski, Howard, Cole).
갈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 바울은 다시 한 번 율법과 약속을 대립시킴으로 율법이 약속을 파기할 수 없다는 것(17절)을 강조한다. 율법과 약속이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이유는 율법이 행함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행함은 구원을 이룰 수 없으며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큰 저주를 초래할 뿐이다. 한편 ‘은혜로 주신’의 헬라어 ‘케카리스타이'(κεχαριστι)는 ‘카리스'(καρις ‘은혜’)에서 온 말로 구원이 값없는 은혜임을 보여주며, 이 말이 완료형인 것은 구원의 영원 불변성을 나타낸다(Boice). 또한 ‘유업'(κληρονομια 클레로노미아)이 약속에 의하여 주어졌다는 사실은 구원이 율법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율법은 구원을 이루는 수단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갈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 지금까지 율법이 약속을 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증명한 후에 이제 바울은 율법의 목적에 대하여 설명한다. 율법의 목적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한다. 공동 번역은 ‘범법함을 인하여’ 대신에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 절에서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ια)를 사용하지 않고 ‘파라바시스'(παραβασις ‘범함’)를 사용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율법의 목적을 논하면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에서는 ‘하마르티아’를 사용했고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4:15)에서는 ‘파라바시스’를 사용하였다. 본절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인간들은’죄’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죄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죄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인식하도록 했다는 것이다(롬 5:20 참조).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 율법이 주어질 때 천사가 함께 했다는 암시는 신 33:2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스데반은 율법을 천사가 전한 것으로 언급한다(행 7:53). 바울은 스데반이 따랐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본 절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천사가 중보자가 되었다는 사상이 아니라 율법이 누군가에 의하여, 즉 최소한 천사와 모세에 의하여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다(Boice).
갈3: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 본 절은 본 서에서 가장 난해 한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학자들은 견해도 250-300여개 정도로 너무 많이 있어 하나의 견해를 취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수많은 견해들을 세 가지 부류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중보'(μεσιτης 메시테스)는 일반적인 의미로 앞절에서 제시한 중보 그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중보를 통해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주어졌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중보를 내세우지 않고 직접 세우셨다는 것이다(15-18절). (2)’중보’를 모세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문맥에 비추어본 해석으로서 앞에서 줄곧 모세 율법에 관해 언급한데다가 본절에서는 정관사 ‘호'(ὁ)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정관사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꼭 한 개인을 지칭한다고 볼 수는 없다(Boice). (3) ‘중보’를 그리스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바울이 딤전 2:5에서 ‘중보’라는 말을 그리스도에 관해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근거한다(Jerome,Chrysostom, Cole). 그러나 이 해석은 문맥에 비추어 보면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위의 여러 견해들이 일치를 보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본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중보에 의하여 전달된 반면 약속은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한다.
이는 약속의 직접적인 전달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언약 체결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내 준다. 또한 그리스도가 중보가 되었든지, 천사나 모세가 중보자가 되었든지 간에 율법이 직접 주어지지 아니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에 바울은 약속이 창15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인 일방성(一方性)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면서 율법보다 약속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갈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율법이 약속을 폐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율법과 약속은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율법과 약속이 서로 대립된다면 하나님의 속성이 내부에서 서로 대립되는 것이 되고 만다. 약속과 율법은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하여 주어졌다.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면,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필요한 요건이 되었다.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 ‘성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그라페'(ἡ γραφη)는 ‘율법'(νομος 노모스)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Bruce, Cole). 바울은 앞 구절에서의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히 보여준 뒤 본 절에서는 율법이 가진 실제적인 기능은 모든 사람을 죄의 굴레 속에 가두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 때문에 사람이 율법주의를 통해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없으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판타'(παντα)는 중성으로 쓰였는데 이는 가장 포괄적(包括的)인 범위를 뜻하는 용법이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타 판타’가 지시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2) 타락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즉 말, 행위, 생각 등을 가리킨다. (3)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타락된 모든 피조 세계(롬 8:22)를 가리킨다. 아담의 타락에 의하여 모든 피조 세계가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타 판타’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유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Boice). 오히려 본절에서는 ‘모든 것’이 하반절의 ‘믿는 자’라는 인칭 대명사와의 연관하에 이해됨이 타당하다. 물론 본절에서 바울이 이방인에 대한 율법의 적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말이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될 자들의 옛 상태를 지시하는 말로 사용된 것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