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Gal) 원어성경강해] 율법으로 죽고 믿음으로 사는 신앙(갈2:11-21)

갈라디아서 2장 헬라어 원어성경 강해 설교말씀은 율법으로 죽고 믿음으로 사는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죽고 믿음으로 사는 신앙(갈2:11-21)

=====2:11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 여기서 베드로의 행위가 명백하게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더욱 뚜렷해진다. (1)’면책하였노라’의 헬라어 ‘안테스텐’이 문자적으로 ‘대항하다’, ‘저항하다’ 혹은 ‘반발하다’라는 의미로 베드로의 행위가 ‘복음의 진리’를 훼손(毁損)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2) ‘안텐스텐’의 시제가 부정과거로서 바울이 베드로를 성공적으로 책망했으며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에 대항하지 못하고 굴복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Lenski). (3) 더욱이 바울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아니고 공개적으로 면책하며 저지했다는 사실로 베드로의 잘못의 심각성이 더해간다(Hendriksen).

이와 같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와는 달리 안디옥에서는 베드로보다 높은 위치에 서서 성도들을 대하는 것같이 느껴지는데, 이는 베드로의 잘못이 너무도 명백하여 견책거리가 되기 때문이다(Robertson).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바울이, 신자라면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완전한 동등권을 항상 공격하며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좁고 치우쳐 있는 유대 중심적 신앙관에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이며(Huxtable) (2) 예루살렘 교회의 그 어떠한 권세자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에 대하여 책망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Cole).

=====2:12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 본 구절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식탁 교제나 성찬을 가리키는 것같다. 이것이 정식 예배였는지 아니면 비공식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임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본절에서 초대교회 당시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과의 식사를 꺼린 사실이 나와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유대인들은 레 11장에 있는 정함과 부정함에 관한 규례를 철저히 지켜왔고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준수하려 하였다(민 25장, 31장;단 1:8;토비트 1:1-12;마카베오상 1:62).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이방인들이 먹는 음식 중에는 레 11장의 정결(精潔) 규례에 위배되는 것이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따라서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지 않으려 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들을 부연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한 규정들 때문이다. 이러한 규정들은 그 종류가 대단히 많고 다양했는데 초대교회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 못지않게 존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실례로 장로들의 유전에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위생상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고 이방 사람들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된 손으로 음식을 먹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마 15;1-20;막 7:1-23).

위와 같은 이유로 오랫동안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심이 굳어져왔다. 이러한 것은 사마리아인도 인식하고 있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할 때 그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대답한다(요 4:7-9). 따라서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뿐 아니라 대단히 죄악된 행동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Hendriksen).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실제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이며 삶이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늘어나는 이방 그리스도인에 대해 몇가지 제한 사항을 제시하고 다른 어떠한 율법의 행위로도 짐을 지우지 않는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행 15:14-21).

저희가 오매…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베드로가 이방 그리스도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사람이 오자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행동의 동기는 예루살렘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Hendriksen). 또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사랑이나 자기 확신에 의해 나온 행동이 아니라 거짓과 위선의 행동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를 책망했다.

=====2:13

남은 유대인들도…외식하므로 – 주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 중 한 사람이요 공적인 위치에 있었던 베드로가 한 외식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복음의 자유가 첨예(尖銳)하게 대립되고 있는 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베드로의 이러한 실수는 단순히 개인적인 외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1) 다른 사람들 심지어 바나바같은 지도자까지도 외식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근거가 되며 (2) 예루살렘 공의회(A.D. 49)의 율법 무용론에 대한 결정을 무효화시키는 것이고 (3) 결과적으로는 율법주의에 굴복한다는 위미를 지닌다. 여기서 우리는 공적인 위치에 있는 지도자의 행동의 중요성과 함께 한 사람의 외식적인 행동은 중요성과 함께 한 사람의 외식적인 행동은 다름 사람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막 7:1-23).

=====2:14

모든 자 앞에서 – 바울은 베드로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공개적으로 책망을 했다. 이는 (1) 베드로뿐만 아니라 여러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잘못을 했으며 (2) 공적인 잘못은 사적으로 고칠 수 없기 때문이고(Lenski) (3) 그러한 실수를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Hendriksen).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 본절에서 바울이 ‘본래 유대인’임을 밝히는 것은 그도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의 종교적 특권을 지녔음을 보여주어 다른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반감을 줄이게 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Cole).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 이방인들에게 ‘죄인'(하마르톨로이)이라고 말하는 것은 윤리적인 판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유대인의 독선에서 나오는 이방인에 대한 통상적인 언급이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그 특권을 자랑하거나 또는 이방인들을 조소하기 위해 ‘죄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비록 바울이 유대교 내의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방 죄인’으로 표현하였지만 이 말 속에는 매우 반어적(反語的)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 죄인으로 간주된 이방인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사실은 스스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을 하찮게 여기며 조금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독선적이고 교만한 태도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다(Cole).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 본절에는 법정 용어인 ‘디카이오스'(‘의로운’)에서 파생된 말이 세 번 반복되고 있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다. 본절에서도 이 용어가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능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뜻이지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를 수가 없다(롬 3:20). 그러나 의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인간의 윤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이며 신적 표준에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는 ‘율법’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모스’는 바울 서신 중 특히 로마서와 본서에 많이 등장하는데 ‘의'(디카이오쉬네), ‘행위'(에르곤) 등과 함께 복음의 핵심을 설명할 때마다 ‘믿음'(파스티스)과 관련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관사없이 사용된 ‘노모스’는 모세의 율법을 지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선한 행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인간들이 ‘자기 의’를 위해 구축한 규범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유대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거짓된 규범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규범으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게 되는 수단일뿐 절대적인 자격이나 요건이 되지 못한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자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롬 5:18,19). 죄악 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이 인간들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게 할 수 있으며 이를 신뢰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이러한 믿음은 생명력이 있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역동적(力動的)인 삶을 살도록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주의자들은 그 믿음에다가 할례와 같은 율법적이요 외적인 조건을 더 하려고 하였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본절은 시 143:2(LXX, 142:2)의 인용이며 아울러 롬 3:20 내용과 병행을 이룬다. 아래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편의 ‘파스존'(‘모든 생명’) 대신에 로마서에서는 ‘파사 사륵스'(‘모든 육체’)를 사용하였고, 로마서와 본절에서는 시편에 없는 ‘율법의 행위’를 부가(附加)시키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단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2:17

그리스도 안에서 – 이 말은 바울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로서 그리스도와 성도 간에 누리는 친밀한 개인적 교제를 시사한다. 그가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 사역을 강조하는 것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며, 예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전파하는 것과 미래 세계에 대한 거룩한 소망을 가지는 것도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며 동시에 전부라고 고백하고 있다. 특히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아담 안에서'(롬 5:12-19)라고 표현과 대조를 이룬다. 아담은 죄와 사망의 옛사람을 대표하지만, 그리스도는 자유와 생명의 새 사람을 대표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실현하신 그리스도와 실존적으로 연합하여(롬 8:39;14:7;빌 2:1) 구원받은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죄인으로 나타나면 – 본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1)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Hendriksen). 다시 말해서 유대주의자들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음으로 율법을 폐기하는 죄인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할 경우에 대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회심을 독려하는 문구로 해석한다(Cole). 이 견해에 따르면, 유대주의자들이 예수를 믿고 율법을 폐기했다면 그들은 스스로 이방인과 같이 율법을 도외시하는 죄인이 된 것이고 그것은 모세 율법보다 저급한 수단의 삶으로 여겨질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그리스도마저 ‘죄를 위한 봉사자'(하마르티아스 디아코노스)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같다. (2)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는 견해이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속에 죄악의 본성이 남아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죄악된 옛 사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롬 7:24)라고 고백한 바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오히려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한다. 이는 유대주의자들이 가진 의식법과 율법주의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역설이다(R.E. Howard). 그가 유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한다고 해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 본절의 해석은 자신이 계속해서 죄인으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전체의 맥락과 연결시킬 때 후자가 보다 타당할 것 같다.

=====2:18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며 – 본문은 다분히 베드로가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로부터 떠나 다시 유대인의 옛 습관으로 돌아간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2:11). 바울은 다메섹의 체험(행 9:1-7)이후에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아니한 일관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한다. 또한 율법의 공로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결단코 없음을 밝힌다.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 ‘범법한 자’의 헬라어 ‘파라바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정의되는 ‘하마르톨로스'(‘죄인’)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파라바텐’은 문자적으로 ‘배신자’,’이단자’를 뜻하며 본절자서는 바울 자신이 다시 율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背信) 행위가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 바울은 ‘나’라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 자신에게 있었던 실제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을 향하여 ‘죽는다’는 표현은 모든 관계가 단절된 것을 의미하며 더이상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었나니’의 헬라어 ‘아폐다논’은 다음 절에 나오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쉬네스타우로마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둘 다 단회적인 것으로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다시 십자가에 못박힐 수 없는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역설적으로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났다’는 표현이다.

로마서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표현했는데(롬 7:4), 이 두 표현은 모두 단순히 사변적인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고백한 말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죄악으로부터 밀려오는 좌절감과 실패를 극복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율법은 인간 속에 있는 죄를 더욱 죄되게 만든다. 율법은 단지 죄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과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기능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2:20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되는 내용으로(1:4;3:1,13;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학적인 논증을 나타낸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W.G.Coltman). 한편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스타우로마이’는 성도가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며(롬 8:4), 또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그리스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롬 8:18).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본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나’ 대신에 ‘그리스도’,(2) ‘율법’ 대신에 ‘믿음’,(3)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롬 8:4).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사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라고 말한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때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2:21

하나님의 은혜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바울 자신이 그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게 된 신비적 연합의 사건이 ‘하나님의 은혜’로 묘사되고 있다. ‘은혜’의 헬라어 ‘카린’은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과 우리로 아들을 믿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갈라디아 주석강해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의 사도권 인정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헛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레안’은 ‘연고없이’,’이유나 목적이 없이’,’불필요하게’등의 의미를 지닌다.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이 다시 율법으로 도아갈 것을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애착심과 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정적인 잘못이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옛 생활에 대한 단순한 향수(鄕愁)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자 하는 범죄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신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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