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알파벳 의미] צדי(짜디) 낚시바늘의 상형의미

히브리어 알파벳 의미 중에서 짜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짜디는 낚시바늘이라는 상형문자입니다. 낚시바늘은 기다림과 소망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צדי(짜데)

צדה(차다 6658) 낚시바늘, 기다림

‘짜디’는 낚시 바늘에서 온 상형문자이다. 뜻은 진리를 수행하는 요소를 선택하는 역할이다. 성경에서 낚시는 비유적으로 선택이나 어떤 것을 취하는데 사용된 듯하다. ‘짜디’는 진리를 수행하도록 삶의 요소를 선택하는 역할을 한다. 낚시 바늘과 같이 계몽할 것들을 낚아 올리는 책임을 말한다. 맡긴 자와의 언약을 사명으로 알고 진리에 매달려서 무지하여 어두운 속성을 계몽시키는 책임을 말한다.

‘짜디’는 동사로 ‘사냥하다, 덫을 놓다’이다. 의미는 ‘진리를 맡은 자에게 매달리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낸다. 진리를 배워 자신의 정신에 잉태한 사람은 삶이 풍족하게 된다. 이와 같이 ‘짜디’는 살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던 혼돈과 결핍된 상태를 진리로 끌어올려 창조주의 인식의 차원으로 계몽되도록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짜디’는 카발라 학자인 ‘알리자 짜디크’에 의해 명명되었다.

그는 ‘짜디’의 다음 글자인 ‘코프’를 글자 ‘짜디’에 추가했다. ‘코프’를 추가해서 צדיק(짜디크 6662)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의로운 사람”, 즉 “거룩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짜디크’를 정의 내릴 수 있게 한다. ‘짜디크’는 하나님의 종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의 종이다. 글자의 순서가 바뀌면, ‘짜디’의 또 다른 의미는 צוד(추드 6679) 즉 ‘뒤쫓아 잡는(to hunt) 추적하다, 사냥하다’이다. 이것은 카발라적 관점에서 ‘짜디’의 실제적인 역할 기능을 나타냅니다.

‘짜디’의 수는 구십(90)이다. 이것은 사라가 자녀인 이삭을 낳은 나이이다. 그래서 잠재적으로 모든 유대인의 아이가 미래의 ‘짜디’라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의식에서 모든 사람은 잠재적으로 ‘짜디’가 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삭’ יצהק(이츠하크)라는 이름에 들어 있는 ‘요드’는 ‘십’이다. 이는 아브라함의 열 가지 시험을 나타낸다. 가장 큰 시험은 그가 자녀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짜디’는 구십으로, 구십은 사라가 생산한 나이이다. 글자 ‘헤이트’는 ‘팔’인데, 이는 할례를 행한 팔 일을 나타낸다. 이삭은 팔 일 만에 할례를 한 첫 번째 유대 자녀이다. 마지막 글자인 ‘코프’는 ‘백’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비해져서, 이삭이 태어난 아브라함의 나이이다.

‘의인’ צדיק (차디크 6662)

창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이었으며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며 하나님의 신앙 안에서 있기를 원했다.

‘의인이요’ צדיק(차디크 6662) 의인, 의로움, 승리자라는 뜻이며 이 단어는 צדק(차다크 6663) 정결하다, 옳다, 올바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올바르게 살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삶을 살았지만 노아는 당세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승리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차디크’의 히브리적 의미는 의인은 하나님께 낚시 바늘에 걸려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의 문을 통과하여 들어와 손에 못 박히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꿈꾼다는 의미이다.

의인에는 스스로 된 의인이 있고 하나님이 인정한 의인이 있다. 스스로 된 의인은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요, 하나님이 인정한 의인은 십자가의 의로 구원을 얻은 자이다. 노아는 십자가의 의로 의인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 마지막 홍수 심판 때에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 율법으로 스스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한 자들은 모두 홍수 심판 때에 죽었다.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행위는 바로 예수님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예수님을 통과하지 않는 인생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라 할 수 없다. 예수님 안에 들어왔다면 진리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말씀으로 훈련받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자가 의로운 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로운 자가 되어 구원을 받은 것이다.

‘금식’ צום (촘 6685)

사58: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식을 형식적으로 하면서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고 있었다.

‘금식하는’ צום(촘 6685) 금식, 금식일이라는 뜻이다. 금식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적으로 회복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세상의 정욕을 위하여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는 것이 금식이 아니다. 육체의 금식을 통해서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결합되어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는 것이 목적이다.

‘촘’의 히브리적 의미는 하나님께 포획되어 있는 자가 세상과 연결된 것을 끊고 주님과 영적으로 연합되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마음과 영혼을 정화시키고 새롭게 운명을 전환시킨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어떠한 문제가 있으면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새롭게 출발하려고 다짐한다. 그중에 영적인 쇄신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금식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 내 안에 혼인잔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금식을 해야 한다. 현재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 없고 신앙이 바닥을 치고 있다면 육적인 금식을 통해서 주님과 연합이 되어야 한다. 현재 나는 하나님 앞에 무엇 때문에 금식하려고 하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히브리어 알파벳 페 입의 상형문자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로움은 도덕적, 윤리적, 의로움이지만 이것으로는 절대 하나님이 보시는 의로움은 될 수 없다.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예수님의 문을 통과하여 죄사함 받고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현재 나의 삶에 예배의 삶이 있는가?

Leave a Comment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