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장 주석강해 설교말씀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당하면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게 됩니다.
모세를 부르심(출3:1-22)
[1-2절]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 . . .
미디안 광야에 약 40년간 거하면서 모세는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쳤다.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아들 미디안의 자손들이라고 본다(창 25:1-6).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사람 보기에 더딘 것 같을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들어 쓰시고자 하실 때 40년을 기다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믿음과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모세는 그 기간 믿음과 겸손과 인내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어느 날 그가 양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 된다(4, 5, 7절).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천사나 사람의 모습으로 종종 나타나셨다. ‘떨기나무’(세네 סנה)는 일반적으로 나무의 원줄기와 가지들의 구별이 분명치 않은 나무(灌木), 예를 들어 진달래 같은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문의 떨기나무는 아마 검은 딸기나무 같은 가시나무일 것이라고 한다(BDB).
모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가지들이 타서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신기한 광경이었다. 불이 붙었으나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것 같다. 떨기나무가 보잘것없는 평범한 나무이듯이, 이스라엘 민족은 보잘것없는 평범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불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은 신기하게도 망하지 않고 있었다.
[3-4절]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 . .
모세는 그곳을 향해 눈을 돌리며 “가서 그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라고 말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셨다.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어떻게 아셨는가? 그러나 실상 그는 모든 사람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부르신다. 그는 후에 엘리 제사장 때에 성소 안에서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어린 소년인 사무엘을 부르셨다(삼상 3:10). 그는 후에 자신을 핍박하던 바울을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셨다(행 9:4).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들은 모세는 즉시 하나님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5-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 . . .
하나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은 어디나 거룩한 곳이다. 흙과 먼지가 묻은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세상적이고 죄악된 생각과 생활방식을 버리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들은 먼저 자신을 성결케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표현은 15, 16절에도 나온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의 경건한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이시다. 기독교는 하루아침에 된 종교가 아니고 인류 역사 시초로부터 계시된 종교이다. 하나님과 경건한 열조들 간에는 언약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계시된 진리들이 있었다. 그것이 성경이다.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었다.
[7-8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 . . .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의 근심과 고통을 알고 내려오셔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어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에 이르려 하셨다. ‘이르려 한다’는 말은 ‘이르게 하려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과 부르짖음을 동정하시며 긍휼히 여기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다(딤후 1:9).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장차 임할 복되고 영광스런 천국을 예표한다.
[9-10절]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 . .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도달했고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도 보셨기 때문에 이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셨고, 모세를 통해 그들을 구원해내시기를 원하셨다. 긍휼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시작하시고 이루실 것이다.
[11-12절]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 . . .
모세는 하나님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자신의 무자격함과 무능력함을 느끼며 대답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사람은 무자격하고 무능력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13-14절]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 . . .
모세는 하나님께 말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사람의 이름은 그의 인격 곧 그 자신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원어(에예 אהיה)는 ‘나는 있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누가 만든 자가 아니고 처음부터 그냥 계신 분이시다. 그로부터 모든 창조세계가 시작되었고 이스라엘과 인류의 구원역사가 시작되었고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질 것이다.
[15절]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 . . .
하나님께서는 또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라. 이것은 나의 영원한 이름이며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니라”고 하셨다. 본절은 앞절의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과 ‘여호와’(יהוה)라는 말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인다. ‘여호와’라는 말은 ‘있다’라는 원어(하와 הוה)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원자존하시고 불변하심을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본다.
[16-18절]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 . . .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말하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정녕 너희를 돌아보았고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고 하셨다”고 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말을 들을 것이다. 16절에 ‘권고한다’는 원어(파카드 פקד)는 ‘방문한다, 돌본다, 돌아본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모세가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라고 하라고 말씀하셨다.
[19-22절]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 . . .
하나님께서는 또 모세에게 “내가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낼 것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출은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다음 몇 장에 나오는 10가지 재앙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취한다’는 원어(니찰템 נצלתם)는 ‘약탈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의 오랫동안의 종살이, 즉 고생과 학대받음에 대한 보상이었을 것이다.
본장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주도하시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스스로 계신 자,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가 맨 처음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또 그가 만드신 세상을 홀로 섭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정하신 때에 그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또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다.
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그를 부르셨고 그와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의 능력과 기적으로 그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 9:16은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언약에 근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셨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그 우고(憂苦)를 아셨다(7절).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도달하였다(9절). 하나님께서는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돌아보셨다(16절). 또 하나님의 긍휼은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에 근거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셨다(6, 15절). 오늘날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에 근거한다.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인물을 부르신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오랫동안 준비되었다. 미디안 광야는 그에게 믿음의 훈련장, 겸손의 훈련장, 인내의 훈련장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한 일꾼을 부르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소관이시다. 모든 직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 마가복음 3:13-15,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고린도전서 12:4-6,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에베소서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꾼을 부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