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4장 설교 말씀은 전도서 기자가 인생 허무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에 대해서 말씀한다. 인생을 살면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한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헛된 인생으로 끝날 수 있다. 세상에서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구원받지 못한 인생은 죽어서 헛되게 된다.
Ⅰ. 학대받는 자들이 느끼는 유혹 4:1-3
솔로몬은 ‘넓은 마음'(왕상 4:29)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사실은 다른 여러 점들 가운데서도 나타나지만 그가 불쌍한 자와 환난당하는 자들에 대해 매우 자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3:16,17에서 압제자들을 비난했었는데, 이제는 학대당하는 자들을 주시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그는 전도자로서 학대당하는 자들을 위로한다.
(1) 학대받는 자들이 처한 환난(1절)은 그를 슬프게 하였다. 종들과 노동자들은 그 주인들에게 학대받고, 채무자들은 잔혹한 채권자들에게, 그리고 채권자들은 사기꾼 빚쟁이들에게 시달림을 받았다. 또한 소작인들은 가혹한 지주들에게, 고아들은 믿을 수 없는 후견인들에게 학대와 수탈을 당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극악한 것은 전제 군주들과 불공정한 재판관들이 백성들을 압제하는 일이었다. 솔로몬은, 자력으로는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을’ 보았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학대자들은 그릇된 일을 행하고서도 자기들의 권세로써 그 잘못된 일을 고집하고 자기들인 행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갔으므로, 가난한 자들은 폭력에 억눌리고 구제받을 길이 없었다.
(2) 이렇게 가혹한 취급을 당하게 되지 그들은, 죽어서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고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소원을 갖도록 유혹을 받는다(2,3절). 그래서 솔로몬은 쾌히 그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나는, 잘 살아보기도 전에 이미 죽은 자를 칭송하였노라. 나는 삶이라고 하는 길고도 무거운 쇠사슬을 질질 끌며 그 지리한 분초를 소모시키면서 아직 살아 있는 자보다 그들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노라.”
태어나서 ‘해 아래서 행해지는 악을 보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이는 태어났다 해도 문제를 개선할 능력이 없거나, 설사 한 문제를 잘 해결했다 해도 여전히 다른 문제로 학대를 받게 되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그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비참한 처지에 있더라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불 속에서조차 여호와를 영화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Ⅱ. 평안에 대한 유혹 4:4-6
(1) 만일 사람이 명민하고 재주가 있어서 사업이 성공적이면 자기 이웃에게 시기를 받는다(4절). 또한 그는 자신의 정직함으로 인해 얻은 명성으로 해서 더욱 시기를 받는다. 가인은 아벨을, 에서는 야곱을,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였는데, 이 모두가 그들의 의로운 행실 때문이었다. 이것은 명백히 악마적인 행위이다. 덕이 뛰어난 자들은 악이 넘치는 자들의 눈에 언제나 가시와 같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어떠한 옳은 일을 하는 데에 용기를 잃어서는 안되며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의 칭찬을 기대하여야 한다.
(2) 만일 사람이 어리석어 자기 사업에 실수를 저지르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5절). 마치 손이 둔하고 거두어져 있는 것처럼 자기 일을 하는 데에 매사에 서투른 ‘우매자’와, 자신의 안일을 사랑하고 손을 따뜻하게 하려고 손을 거두는 ‘게으름장이’는, ‘자기 살을 먹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식인종이 된다. 그는 자기 살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처지까지 스스로를 몰고 가는 것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리라(6절). 이 말씀은 다음의 두 가지 각도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
1) 마치 정직하게 수고하여 풍부한 것보다 게을러서 조금 가지는 것이 더 낫다는 투로 자기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는 게으름장이의 주장으로 볼 수 있다.
2) 그러나 이것을 수고와 게으름 사이에서 중용을 취하라는 솔로몬의 권면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정직과 근면으로 한 손 가득히 붙들라. 그러나 양 손에 가득히 잡음으로써 마음을 쓰게 하지 말라. 적당한 수고와 적당한 수익이 가장 좋은 것이다.
Ⅲ. 서로 도우라는 권면 4:7-12
솔로몬은 이 세상의 헛된 것에 대해 또다른 실례를 들어 보이는데, 그것은 흔히 사람들이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가지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러한 욕망에 너무도 열중하여,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1) 이기심이 바로 이 악의 원인이다(7,8절). ‘어떤 사람이 홀로 있는데’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없으며 또한 그는 다른 사람이 있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한 집에 한 입만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자기 사업의 노예로 만든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8절).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돌볼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며 가족을 위한 지출비가 겁이 나서 결혼도 하려 하지 않는다.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 그는 자신이 충분히 가졌다고는 절대로 생각지 않는다.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그는 등을 따뜻이 하고 배를 불리며 자기 직업과 가족, 이 세상에서 멋지게 사는 일에는 모자람을 느끼지 않았으나, 그것들이 자기 눈에 차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소유가 주는 위로를 거부한다. 내가…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그에게는 이런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는 ‘아들도 없으며 형제도 없다.’ 즉 그에게는 불쌍한 자도 사랑스러운 자도 없는 것이다. 자기들의 모든 수고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가치있는 일인지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 보고서 이 세상에서 수고하는 자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만일 사람들이 이 점을 숙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되어 무고한 노고’이다. 그들은 아무 의미도 없이 수치를 당하며 애태우는 것이다.
(2) 친목이야말로 이 악에 대한 치료책이다.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하려 들기 때문에 이처럼 비열하게 되는 것이다. 솔로몬은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창2:18)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결혼과 우정을 권장하고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9절). 그들 중 어느 쪽이라도 따로 떨어져 있는 것보다는 결합해 있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이다.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자기를 섬기는 자에게는 자기 자신만이 회계 주임이 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은 ‘좋은 상’을 얻는다. 거룩한 사랑의 즐거움과 유익은 사랑의 모든 일과 수고에 대하여 풍부한 보상이 될 것이다.
그는 우정과 좋은 교제의 유익에 대한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여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혹시 한 사람이 넘어지게 되면 다른 한 사람이 즉시 그를 붙들어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만일 죄에 빠지게 된다면 그의 친구는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돌이키고자 도와 줄 것이다. 덕스럽고 은혜로운 애정은 좋은 교제를 통해 일어나며, 기독교인들은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서로를 분발시킴으로써 서로 간에 따뜻하게 한다. 만일 대적이 홀로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그 대적은 그를 이기기 쉽다. 그러나 만일 그에게 조력자가 있다면 그는 그 대적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12절). 로마인들이 영국을 침범했을 때의 고대 브리튼 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분산된 부대로 싸우는 동안 대세를 그르쳤다.”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도 우리는, 영적 사업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주는 위로에 버금가는 것은 성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위로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잠언으로 결론을 짓는다. ‘삼겹 줄은’ 한 다발의 화살과 마찬가지로 ‘쉽게 끊어지지 않지만’ 줄 한 가닥과 화살 한 개는 쉽게 끊어진다. 그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삼겹 줄’에 비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룩한 사랑과 우정으로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는 두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와 합류하셨던 것처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오셔서 세 번째 분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세겹의 줄이 되는 것이다.
Ⅳ. 명예의 헛됨 4:13-16
(1) 왕이라도 지혜가 없으면 행복하지 않다(13,14절). 만일 그가 우둔하다면 그는 어떠한 충언이나 간함도 받지 않을 것이다. 우매함과 고집은 흔히 함께 와서, 충고를 가장 필요로 하는 자들로 하여금 한사코 그 충고를 받지 못하게 만든다. 만일 사람이 충고를 들어줄 만한 진정한 지혜와 덕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나이가 지위로도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연소함과 가난이라는 불리한 조건하에 있더라도 지혜와 덕이 있는 자면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 왕이 만일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일에 꾸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십중 팔구 왕위에 계속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왕된 자에게는 반드시 후계자 곧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날 소년’이 있어야 한다. 그 소년은 왕 자신의 소생이거나 아니면 13절에서 말하는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다. 백성은 결코 오랫동안 편안해 하고 만족해하는 법이 없다.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16절). 그들은 끊임없이 변화를 좋아하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갖고 싶어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아마 여전히 그럴 것이다. ‘후에 오는 자들’도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는 매우 좋아했던 것처럼 보이는 왕에게조차도 오랫동안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은 ‘호산나’라고 하지만 내일이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칠 것이다. 이것도 헛되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