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2장 은혜로운 말씀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허무에 찬 말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쾌락과 성공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가게 된다. 그런데 이것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허무하게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은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우리가 인생을 허무하게 끝나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
Ⅰ. 세상적인 즐거움의 헛됨 2:1-11
솔로몬은 여기에서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자기가 헛되이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며 공부하던 서재를 떠나 공원과 정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철학자들과 위엄있는 원로 정치인들과의 교제를 재사와 호걸과의 교제로 바꾸어 그들 가운데서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해 본다. 여기서 그는 고귀한 지적인 즐거움으로부터 천한 감각적 쾌락으로 수준을 크게 낮춘다.
(1) 그는 환락과 즐거운 재담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시험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낙을 누리라(1절). “즐거움으로 가득 채우고 근심은 던져 버리라. 그리고 즐거워하겠노라고 결심하라.” 가난하면서도 매우 쾌활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헛간에 사는 거지들도 그렇게 지낸다는 속담도 있다. 유쾌함은 이성의 힘이 주는 기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단순히 세속적이고 육욕적인 쾌락보다는 우선적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웃을 줄 아는 동물’이라는 점에서도 짐승과 구별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웃어서 살찌고 웃어서 행복해지도록 해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실험을 해보고 난 뒤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2절). 건전하고 적당하게 그리고 온건하게 사용하는 순수한 희락은 좋은 것이며 사업에 도움이 되고 인생의 수고로움을 누그러뜨리는데 힘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도가 지나치고 절제하지 못할때에는 어리석고 무익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현재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괴로움에 대한 진통제에 불과한 것이다.
(2) 자신의 생각을 만족시켜 주던 것에서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 그는, 이번에는 자기 입을 만족시켜 주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시험해 보기로 결심하였다(3절).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즉 고량 진미와 좋은 술에 빠져 보겠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비판 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쾌락에 뛰어들었으며 단지 실험을 해보려고 하였을 뿐이다. 그는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이 어리석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한계의 끝까지 가보려고 하였다. 그는 어리석음이 자기를 붙잡게 하거나 지배하게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였다.
동시에 그는 지혜에 통달하고, 그의 쾌락을 사용함에 있어 현명하게 처신하도록 주의를 기울임으로서 자신이 그 쾌락들로 인해 어떠한 편견도 갖게 되지 않고 그것들에 대한 적절한 판단을 내리기에 부적합한 자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솔로몬은 이러한 실험을 꾀하였으나 그것도 ‘헛된 것’임을 발견하였다.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잠 20:1). 어떠한 자라도 술에 빠져 있다가 더 이상은 마시지 않겠노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솔로몬이 목적한 바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행복을 찾아 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인생의 행복이 ‘인생이 종신토록 생활하면서 얻는 쾌락’이라고 기술하였다. “선하신,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행하오리까?” 우리의 행복은 나태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하고 좋은 일을 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생활 방식을 발견하기를 원하여 술에 빠져 버리는 자는 여기서 솔로몬이 반성하는 가운데 자책하였던 우행을 범하는 자이다.
(3) 술에 빠지는 것이 어리석은 짓인 줄을 곧 깨달은 그는, 이번에는 매우 사치스러운 유흥과 향락을 시험해 보았다.
1) 그는 성읍과 시골에 건축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자기의 치세 초기에 하나님을 위한 전을 세우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했으므로, 그 후에 자기를 위한 건물을 세워 자신의 기호를 만족시켰다 할지라도 용납될 수 있었다. 건축에 있어서, 그는 가난한 자들을 고용하며 후손들에게 유익을 베푸는 즐거움을 누렸다. 우리는 열왕기상 9:15-19에서 솔로몬의 건축에 대해 읽을 수 있는데 그 건물들은 모두 ‘큰 역사’였다. 이제 그의 과오들을 살펴보자. 그는 자신이 행해야만 하는 ‘선한’ 일들을 탐구하였으며(3절) 이것을 추구하느라 큰 역사에 몰두하였다. 선한 일들은 참으로 진실되고 위대한 일이지만, 선하지도 않은 많은 일들이 위대한 일로 명성이 나고 있다.
2) 그는 정원을 몹시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건축물 만큼이나 매혹적인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4,5절). 그에게는 재목으로 쓸 나무숲이 있었을 뿐 아니라 각종 과일나무 숲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직접 심은 것이었다.
3) 그는 수로 사업과 연못과 운하 등을 위해 막대한 돈을 들였는데 이는 오락이나 기분 전환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해서였다(6절). 그는 그것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물도 주었으며 그리고 나서 그것을 증식케 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이다.
4) 그가 ‘큰 역사’를 하기로 계획했을 때 많은 일군을 고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노비’들을 돈을 주고 사서 충당하였고 그들로부터 종들이 ‘그의 집에서 태어나게도’ 하였다(7절).
5) 그는 자기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대상 27:29,31) 크고 작은 가축 떼, 곧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다.’
6) 그는 매우 부유하게 되었으며, 건축과 정원 가꾸기로 인해 가난하게 되지도 않았다.
7) 그는 온갖 종류의 가락과 음악, 성악과 기악하는 자들을 손에 넣었다. 이것들은 ‘인생들의 기뻐하는 것’들로 불리우고 있다.
8) 그는 이성적인 즐거움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동시에 즐겼다. 이러한 오락물을 가운데에서도 ‘그의 지혜는 그에게 여전하였다'(9절). 그의 판단력과 양심은 그의 즐거움을 억제하지 않았으며 감각적 쾌락의 진수를 추출해 내려는 그의 시도를 방해하지도 않았다(10절). 그는 이제까지 살았던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의 일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누렸다.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그가 자신의 사업에 성공을 누리게 된 것은 그 사업 자체를 감미롭게 해주었으며, 즐거움이 그 사업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은 그 즐거움을 감미롭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전반적으로 볼 때, 그는 이 세상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9) 우리는 마침내 그가 이 모든 일들에 대해 신중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대하게 된다(11절). 솔로몬은 자신이 최대의 비용과 주의를 기울여 ‘자기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자신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수고한 모든 수고’를 세밀히 검토해 보았으나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라, 모든 것은 헛되며 마음의 헛된 수고였도다.”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노동이나 이 세상의 향락으로도 아무런 유익이 없었던 것이다.
Ⅱ. 지혜의 우월성 2:12-16
솔로몬은 지금까지 학문에서와 감각적 쾌락에서 무슨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았는데, 이제 여기서는 그것들을 비교하며 판단을 내리고 있다.
(1) 그는 지혜와 우매를 함께 깊이 생각해 보려한다. 즉 그는 여기서 그것들을 다시 돌아보아, 두 번째 관찰과 생각을 통해서 더 많은 만족을 얻을 수 있는지 여부를 알고자 한다. 우리는 이 세상 것들에 대해 내린 솔로몬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시험을 다시 해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실험을 했을 때 가지고 있었던 유리한 점들을 전혀 가질 수 없으며 그와 똑같은 열심을 가지고 실험을 할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2) 그는 우매함보다는 지혜에 월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같도다(13절). 지혜가 주는 즐거움은 비록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 충분치는 못하지만 술이 주는 즐거움보다 훨씬 낫다. 지혜는 영혼이 놀라운 발견을 할 수 있도록 밝혀 주며 그 영혼 자체를 올바로 다스릴 수 있도록 필요한 지시를 해준다. 그러나 육욕은 마음을 흐리게 하며 흑암과 같이 되게 한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한글 개역 난외주에는 ‘지혜자는 눈이 그 머리에 있고’로 되어 있음-역주). 그 머리에는 피해야 할 위험과 활용해야 할 이점들을 즉시 발견할 수 있는 눈이 있다.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은 때때로 당황하거나 맹렬히 돌진하거나 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속하는 행복과 만족이란 점을 볼 때, 그는 이 세상의 지혜가 인간에게 이점을 거의 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동일한 질병과 동일한 칼날이 지혜로운 사람과 우매한 사람을 모두 삼켜 버리는 것이다. 솔로몬은 이 굴욕감을 느낄 만한 관찰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다(15절). “이 생에 대하여 지혜가 내게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큰 수고를 했었는가?”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로운 사람들이나 우매한 사람들이나 똑같이 망각된다(16절).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의인들은 ‘영원히 기념하게 될’ 것이며 그 기억이 복될 것이다. 곧 ‘별처럼 빛날’ 것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지혜에 관해서는 그러한 약속이 주어지지 않는다. 즉 그 지혜가 사람들의 이름을 영속시켜 주리라는 약속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기록된’ 이름들만이 영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건한 자의 죽음과 사악한 자의 죽음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지혜로운 자의 죽음과 우매한 자의 죽음 사이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Ⅲ. 재물의 무익함 2:17-26
솔로몬은 사색하는 생활과 육욕적인 생활을 경험한 뒤에 활동적인 생활에 온 정력을 쏟아 보았으나, 다른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큰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그것 역시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일인 것이다.
(1) 그가 시험해 본 사업은 ‘해 아래서 하는 일’이었다(17-20절). 즉 이 세상의 일들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왕의 사업이었다. 솔로몬이 여기에서 거의 만족을 얻지 못한 채 말하는 것은 ‘해 아래서 하는 수고’, 곧 ‘썩는 양식을 위한 일’에 대한 것이다(요 6:27;사 55:2). 그것은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하는 보다 나은 종류의 사업이었다(21절). 그것은 온당한 사업으로, 그의 왕국의 통치에 관련된 일이었다. 또한 그 일은 자신의 ‘지혜를 나타내는’ 일(19절)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세상 사업에 종사하면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지혜를 나타내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
(2) 그는 그 일에 곧 싫증을 내게 되었다. 내가…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18절). 그는 훌륭한 집과 동산들을 소유한 지 얼마 안되어 그것들을 하찮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세상 것들에 대한 은혜로운 증오심, 즉 그것들을 하나님과 종교보다 덜 사랑하라는 우리의 의무를(눅 14:26) 표현하는 것도 아니며, 이 세상 것에 대한 죄된 증오심,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정해 주신 장소와 그곳에서 하는 일에 싫증을 내는 우리의 우매함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바로, 세상 것들에게서 받는 실망감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증오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3) 다음의 두 가지 점이 그를 싫증나게 만들었다.
1) 그의 사업은 그 자신에게 너무나 큰 수고가 되었다.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17절). 사업가는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불안하다고 묘사되어 있다(23절). 그는 낮에도 자신의 즐거움을 빼앗기고 ‘밤에도’ 휴식을 방해받는다. 세상 일을 악착같이 하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안식으로 삼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보라.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불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은 ‘모두 헛된 일’인 것이다(17절).
2) 그가 일하여 얻은 것들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은혜로운 영혼은 이 일로 전혀 마음이 불편해 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가고 난 뒤 우리 뒤에 오는 자들이 우리의 지혜와 근면함 덕으로 더 나은 생활을 하게 될 것을 기뻐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는 자기에게 물려 받는 자가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 알지 못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것을 더욱 증식시킬 것이요 우매한 자라면 그것을 모조리 없애 버릴 것이다. 아마 솔로몬은 르호보암이 그렇게 될까봐 우려하면서 이 글을 매우 실감나게 썼던 것 같다.
(4) 그러므로 이 세상의 부를 가장 잘 쓰는 방법은 그것을 즐겁게 사용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내용으로 이 장을 끝맺는다(24-26절). 여기에서 우리에게 권장되고 있는 선은, 우리가 이 세상의 사업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고 추출해 낼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이익이며, 또한 이 세상 사업의 헛됨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멀리 가는 것이다. 우리는 재산을 늘리는 방법에 골몰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위탁된 목적을 위하여 그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먹고 마실 수 있도록’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사업을 포기하고 편안히 있으라고는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수고하는 가운데서 낙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 만물을 물리치지 말고, 우리의 세속적 사업을 부지런히 그리고 즐겁게 행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이용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그 낙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즐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다. 솔로몬 자신은 자신의 소유물과 비교해 보아 더 이상 목표삼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더 나은 것을 원할 수도 없었다(25절). 솔로몬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없이 자신의 지혜로써는 심령의 낙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에서 그것을 기대하고 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재물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소유자에게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 재물과 함께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사’ 그 재물이 그에게 상이 되도록 하심으로써, 그들이 재물을 즐거이 누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자비롭게 전하게 하신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그 재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으로 그 악인에 대한 형벌을 삼으신다. 즉 재물은 오직 그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이 될 뿐이다. 만족한 경건은 큰 득이 된다. 불경건은 흔히 불만족과 물릴 줄 모르는 탐욕으로 벌을 받는데, 이 불만족과 탐욕은 그 자체가 징벌이 되는 죄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