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장 설교문은 전도자가 인생의 허무함을 인정하고 있다. 인간이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지만 결국 허망하게 인생이 끝난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죽는다. 죽고 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우리가 전도서를 통해서 인생의 허무함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을 소망해야 한다.
Ⅰ. 서언과 주제 1:1-3
(1) 본서의 저자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는 솔로몬이었다. 왜냐하면 그 말고는 다윗의 아들 중에서 ‘예루살렘의 왕’이 된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평화로움’을 뜻하는 자신의 이름 ‘솔로몬’을 숨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자기 자신과 왕국에 환난을 자져왔었으며 그와 하나님 사이의 평강이 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그 이름을 쓸 만한 자격을 잃어 버렸던 것이다. “나를 솔로몬이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 왜냐하면 내가 몹시 큰 고통을 당하였음이라.” 그러나 그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일컫는다.
1) 전도자 : 이것은 그의 현재의 신분을 암시한다. 그는 “코헬렛”이다. 이 말은 “모은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에서 나온 용어이다.
① 코헬렛은 ‘참회하는 영혼’ 또는 잃어 버린 양처럼 헤매다가 그 방황에서 돌아와 ‘회복된 사람’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이제 흩뜨러진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다시 회복되어 집중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참회하는 영혼의 깨어진 마음만 받으시며 잡풀처럼 단 하룻 동안만 굴복하는 머리는 받지 아니하신다. 즉 곁 길로 갔다가 돌아오는 영혼만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② 전도하는 심령은 모으는 심령이다. 자기 자신이 회복되고 교회와 화해하게 되자, 솔로몬은 자신처럼 방황했던 다른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는데 힘을 기울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을 통하여 솔로몬과 화해하셨다는 징표로 그를 전도자로 삼으셨다. 전도자의 사명을 맡기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죄를 무언중에 용서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베드로에게 그의 양들을 맡기심으로써 그를 용서하셨음을 충분히 나타내셨다.
2) 다윗의 아들 : 그는 자신에게 그러한 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자기의 죄를 몹시 가중시키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회개하고 자비를 소망하도록 용기를 갖게 하였다. 왜냐하면 다윗도 전에 죄에 빠졌었으나 회개하였기 때문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는 다윗을 본보기로 삼아 다윗처럼 자비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3) 예루살렘의 왕 :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왕위에 앉히시는데 있어서 많은 일을 행하셨었다. 하지만 솔로몬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던 것이다. 이제 그는 왕으로서 전도자가 된다는 것이 자기의 명예를 실추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오히려 백성들은 그가 왕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를 전도자로 더욱 존중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2) 본서의 전체적인 의도와 목적은 우리를 진실로 경건하게 만들기 위하여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존중과 기대를 낮추는데 있다. 이를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1) 이 세상 것들은 ‘모두 헛되다'(2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즉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악용될 때뿐만 아니라 정상적으로 사용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결국 헛되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문에서 매우 강조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모든 것의 결과가 헛될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 모든 것은 그 자체가 헛될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 모든 것은 그 자체가 헛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전도자는 허무가 마치 이 세상 만물의 속성 중 하나인 것처럼 여기고 본문을 기록한 듯싶다.
그것들은 ‘헛될’뿐 아니라 ‘헛되고 헛되다,’ 즉 헛된 것 중에서도 가장 헛된 것이며 극도로 헛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은둔자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자기들이 거지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경멸하여 말한다. 그러나 솔로몬은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연의 심오한 곳까지 탐구하였었다(왕상4:33). 또한 그는 세상을 소유하되 어느 누구가 소유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이 수유하였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세상에 대해 신중하게 말하였으며 그것을 근본적인 원리로 규정하여 사람이 경건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한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가 주로 의도했던 한 가지 사항은 다른 세상에 틀림없이 영원한 보좌와 왕국이 있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헛될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들로는 영원한 보좌와 왕국에 대한 약속을 이루기에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2) 이 세상 것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에는 부족하다. 사람이…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3절). 이 세상에서 할 일이란 ‘수고’이다. 이 ‘수고’란 염려와 고생을 의미한다. 수고는 사람들을 지치게 만드는 일이다. 솔로몬은 잠언 14:23에서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다’고 말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에서 그 수고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다고 부정한다. 세상에서 현재 우리의 처지를 볼 때, 우리가 수고를 통하여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손으로 수고한 것을 먹는다. 그러나 본문에서 솔로몬은 그것이 진정한 유익은 아니라고 단정한다. 요컨대 이 세상의 부와 쾌락은, 설사 우리가 그것들을 매우 많이 가지고 있다 손 치더라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에는 충분치 못한 것이다. 재물이 늘면 그 재물에 대한 염려도 늘게 마련이며 여러 가지 걱정이 늘어나면 그 걱정으로 인해 재물을 소모하게 되어 아무리 사소한 걱정이라 하더라도 재물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위로를 송두리째 앗아갈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우리의 영혼과 앞으로 오게 될 삶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훨씬 더 진실 되게 “사람의 모든 수가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수고하여 얻은 것 모두를 가지고도 영혼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할 수 없으며, 영혼의 죄를 대속받을 수도 영혼의 질병을 치유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Ⅱ. 이 원리를 입증함 1:4-8
해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의 허무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솔로몬은 여기서 우리가 이것들을 누리는 기간이 너무도 짧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한 세대밖에는 살 수 없다. 한 세대는 다른 세대를 위해 자리를 남기도록 끊임없이 소멸하며 우리는 한 세대와 함께 사라져 버린다. 인류라는 강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동안 즐거움의 강둑에 기쁨이라고는 거의 한 방울도 묻어 본 적이 없지 않는가! 우리는 세대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행복에 관해서는, 한 세대라는 그렇게 좁은 한도 내에서 행복을 기대하지 말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가운데서 행복을 찾도록 해야 한다.
이 세상은 끝이 있으며 그때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모조리 타버릴 것이라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인류를 위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인간 하나 하나는 어떻게 끝날 것이며 또 그때 어떻게 영의 세계로 옮겨질 것인가? 인간은 세상에 잠시 잠깐 머무를 뿐이다. 해는 분명히 매일 밤 진다. 그럼에도 그것은 아침에 다시 떠올라 전과 변함없이 밝고 신선하다. ‘그러나 사람은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욥 14:7,12). 이 세상 만물들은 항상 움직이고 변하기 쉬우며 불변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이 변덕스럽고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만물이 이렇게 피곤한(8절) 세상 중에서 안식을 기대할 수 있겠으며, 언제나 간조와 만조가 있고 파도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서 안식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마음이 추구하는 것은 해와 바람과 강들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전혀 만족해하지도 흡족해 하지도 않는다.
그 마음은 세상의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많이 가지려고 한다. 아무리 많은 강물이 흘러들어도 바다가 채워지지 않듯이(7절), 인간의 마음은 아무리 외적인 번영을 누린다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한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거친 바다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땅은 항상 있던 그대로 있으며 해와 바람과 강들은 변함없이 같은 진로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족과 새로운 세상을 얻기 위하여 해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감각은 불만족스러워하며 그 감각의 대상들은 마음에 차지 못한다. 호기심은 여전히 있게 되는데 이는 호기심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을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더욱더 까다롭고 성마르게 “달라, 달라”고 부르짖기 때문이다.
Ⅲ. 새로운 것이 전혀 없는 변화 1:9-11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지식에 있어서 우리만큼 장족의 발전을 이룬 자도 없으며 그 지식으로 이토록 눈부신 발견을 해낸 자도 없다는 사실, 즉 이렇게 뛰어난 진보를 보인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는 새로운 양식들과 새로운 가설들, 그리고 새로운 방법들과 새로운 표현들을 자랑한다. 이 모든 새로운 것들은 옛 것들을 밀어제치고 압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대단히 큰 잘못이다. 우리가 자연이 왕국에서 ‘이것이 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자연의 힘과 그 인과 관계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지금도 변함없다. 인간의 마음과 그 마음의 부패도 여전히 똑같다.
인간의 욕망과 추구하는 바와 불만 역시 여전하다. 앗수르인 타티아누스는 그리이스인들이 자기들의 독창적인 것들인 양 자화 자찬하던 모든 기예들이 그들이 야만인들로 간주하던 민족에게서 빌어온 것임을 지적하면서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것들을 ‘유레세이스’ 곧 발명품이라고 부르지 말라. 그것들은 ‘미메세이스’ 곧 모방품에 불과한 것들이라.”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며 우리 선조들은 이 세상을 더할 나위 없이 소중히 여겨 왔거늘, 이 세계가 우리보다 앞서 간 자들 이상으로 우리에게 더 친절하리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새로운 것들을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을 상세히 앎으로써 새로운 성품을 지녀야만 한다.
그러게 될 때에 ‘이전 것은 지나가고 만물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고후 5:17). 복음은 ‘우리 입에 새 노래’를 넣어 준다. 자기들의 이름이 길이 남으리라는 점, 곧 자기들이 이룩한 업적들을 후손들이 기릴 것이라는 점에서 만족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당대에 매우 위대해 보이고 크게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게 된 사악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여기 저기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나 업적이 친절한 역사가를 만나 기록에 남을 수 있는 행운을 가지게 되는 반면, 그보다 못지 않게 훌륭하면서도 누락되어 버리고 마는 인물이나 업적도 있는 것이다.
Ⅳ.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헛됨 1:12-18
이성적인 피조물에게 가장 확실하게 복이 되는 것은 지식과 학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식과 학문이 헛된 것이라면 그 외의 모든 것이 헛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여기서 솔로몬은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서 시험해 본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만일 지식에서 참된 만족이 발견될 수 있었다면 그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왕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아테네가 한때 누렸던 것보다 더 훌륭하게, ‘세계의 눈’이라고 불리울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솔로몬은 자신의 큰 재산과 존귀로 그 궁정을 학문의 중심지와 학자들의 회합 장소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혹은 인간의 기술과 총명에 의해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에 통달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었다.
그는 왕이었지만 스스로 학문에 꾸준히 정진하였으며 그 학문에 있어서 해결되지 않는 난제가 있다 하더라도 낙심하는 일도 없었고 학문의 깊이를 소홀히 하는 일도 없었다. 또한 그는 이것으로 단순히 자신의 천재성을 만족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그 자신의 세대에게 봉사하기 위한 자격을 갖추고자 하였으며 지식이 어느 정도까지 확장되어야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보았던 것이다. 그는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다(14절). 즉 상계와 하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보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탐구가 성공할 때에 큰 만족을 느꼈다. 솔로몬은 분명히 이 일에 있어서 유능한 감식가라고 인정받을 만하였다.
즉, 그는 자기 머리를 이해력으로 가득 채웠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으므로, 지식의 즐거움 뿐 아니라 그 능력과 유익까지도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잘 음미해 보았던 것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것을 활용하는 법 또한 알고 있었다. 솔로몬은 자신의 지식을 향상시키는 데에 매우 부지런하였으므로, 총명한 사람들의 지혜와 우매한 사람들의 미친 것, 곧 ‘부지런한 자의 밭’에서 뿐만 아니라 ‘게으른 자의 밭’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2) 그는 자신이 앞서 말했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이 시험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지식에 대한 탐구가 마음을 매우 괴롭게 하고 피곤케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13절). 육신을 위해 양식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양식인 지식도 얼굴에 땀을 흘림으로서 얻어야 하고 먹어야 한다. “나는 잡무로 가득 찬 세상의 모든 일을 보았으며 인간들이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을 살펴왔노라. 그런데 보라!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내가 보니 모든 것이 헛되고 마음만 상하게 하는도다.”
세상에 대해 보면 볼수록 우리는, 우리를 거북하게 만드는 것을 더욱더 많이 보게 되며 헤라클리투스와 같이 모든 일을 통곡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솔로몬은 특히 ‘지혜’와 ‘미련한 것’에 대한 지식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을 감지하였다(17절). 그는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미련하면서도 그 미련함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였다.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게 되었을 때에도 만족을 얻을 수 없었으며 그 지식으로 남들에게 자신이 기대하던 정도의 유익을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15절). 인간의 마음과 태도는 구부러져 있고 완악하다.
솔로몬은 자신의 지혜와 권세로 자신의 왕국을 완벽하게 개혁시키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 일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 세상의 모든 철학과 정치학으로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원상태로 복구시킬 수는 없다. 학문은 인간의 타고난 기질을 바꾸지 못할 것이며 인간의 죄많은 고질병을 치료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지식은 모자라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서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이다.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전체적인 결론을 내리기를, 위대한 학자들은 그들 자신을 심하게 애곡하는 자들도 만들뿐이라고 하였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18절). ‘지식을 더하는’ 자들은 이 세상의 재난들에 대해 보다 신속하고 민감하게 감지하게 된다. 우리는 유용한 지식을 추구하는 일에서 물러나지 말고 지식이 주는 근심거리들을 참을성있게 극복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 안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조심스럽게 이행하는 데에서만 진정한 행복을 기대해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