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3장 설교 말씀은 메시야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 고난받고 부활로 승리할 것을 말씀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수난받고 고난받을 것을 예언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선택받은 백성을 위해서 죽었다.
Ⅰ. 메시야가 받을 굴욕 53:1-3
이사야 선지자는 52장의 끝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 가운데서 호의적으로 영접되리라는 것을 예견하며 예언한 바 있다. 이제 그는 여기에서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임재에 대해 이미 통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그들의 경멸(1)
이것은 사도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거의 복음을 전파하지 못한 사실에 적용될 수 있다(롬 10:16).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미리 말했던 선지자들을 믿은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실제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관원이나 바리새인 중에서 그를 따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평민들 중 여기 저기서 모여들었던 사람들만이 그를 따랐다. 그리고 사도들이 온 세상에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사방에서 그 소식을 믿었으나 거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이 소식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진심으로 그 소식을 영접하고 그 권능에 복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말씀과 함께 수반되는 하나님의 권능과 그 말씀을 효과적으로 실행하는 성령의 사역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 속에 있는 빛에 대항하여 거역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복음을 믿지 않는다.
2.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그들의 경멸(2,3)
(1) 그가 처했던 비천한 상태와 그가 자신을 낮추고 비웠던 정도 : 그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나타내신 특성은 유대인들의 메시야관과 전혀 부합되지 않았다. 그의 태생은 매우 위대하고 존귀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그렇지 못했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었으나 그 탁월한 왕족의 세력이 몰락했을 때 출생했다. 그리고 그 후예인 요셉도 가난한 목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본문에서는 그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유대의 북쪽 지방인 갈릴리의 비천한 가문, 곧 메마른 땅과 같이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던 촌락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뛰어난 것이나 위대한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가문에서 태어나셨다.
그는 공개적으로 오실 뿐 아니라 장엄하며 굉장한 모습을 지니고 오실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그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성장했다. 그는 ‘연한 순’같이 조용하고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라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곡식이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어떻게 자랐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막 4:27). 그는 얼굴이나 풍채가 특히 아름다워 그를 본 모든 사람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런 종류의 모습이 전혀 없었다. 즉 그가 불구이거나 기형으로 생겼다는 뜻이 아니고 사람들이 성육하신 하나님 속에서 기대할 수 있는 특별히 고운 모양이나 풍채도 그에게는 없었다는 뜻이다. 모세는 태어났을 때 축복의 전조로 간주될 만큼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을 가졌었다(행 7:20;히 11:23).
다윗도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삼상 16:12). 그러나 세상에 드러난 우리 주 예수의 모습은 그 속에 칭송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복음도 ‘지혜의 권하는 말’로 전파되지 않고 전혀 꾸밈 없는 말로 전파되었다. 그는 또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초대하여 즐거운 생활을 만끽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였다. 그의 형편은 여러 면에서 비참했다. 그는 제대로 한곳에 정착하지도 못했고 머리 둘 곳도 없었으며 헌금으로 그날 그날 살아갔고 방해와 위협까지 받았으며 자기에게 대적하는 죄인들의 행동을 참고 지냈다. 그의 심령은 온유하여 슬픈 인산들을 드러냈다. 그는 슬픔에 아주 익숙해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자세히 알고 그 슬픔을 진심으로 동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그에 대한 사람들의 경시 : 그에게는 모든 열방의 흠모를 받기에 충분한 거룩한 아름다움과 선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러한 아름다움을 바라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눈으로만 식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악한 사람으로 알려져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했다.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3절). 그런데 이 말은 ‘그가 얼굴을 가리운 사람같아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그의 위엄으로 드러나는 영광을 은폐하고 그 영광을 베일로 가렸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그 베일을 꿰뚫고 그의 영광을 올바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Ⅱ. 메시야의 수난 53:4-9
(1)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천하게 되신 상태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정도로 스스로 천하게 되셨다.
1) 그는 질고와 슬픔을 당하셨다. 그는 그 슬픔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 슬픔으로 인하여 움추리지도 않으셨고 그 속에 잠겨 있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끝까지 견디면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하기까지 하셨다.
2) 그는 매를 맞고 상처를 입으셨다. 그는 ‘징벌을 받고 맞으며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악을 행하는 자로 거부를 당하고 온갖 악평을 다 들음으로써 혀로 매를 맞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손으로 매를 맞았다.
3) 그는 채찍질을 당하셨다. 그는 아무리 악한 자라도 40대 이상을 허용하지 않는 유대의 관용적인 율법에 따라 채찍질을 당한 것이 아니라 로마 사람들의 관례대로 채찍질을 당하셨다. 빌라도는 십자가에 못박는 것만큼이나 심한 채찍질을 그에게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채찍질은 아직 십자가에 달리는 것의 전조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십자가에서 그는 손과 발과 허리에 상처를 입으셨다.
4)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뿐 아니라 능욕을 당하기까지 하셨다(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 자신의 뜻을 잃지 않으셨다.
5)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가셨다'(8절). 그는 행악자로 소송을 당했다. 그는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갔으며 죄수가 되었다. 그는 재판을 받고 비난을 받았으며 심리를 거친 다음 정죄를 받았다.
6) 그는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산 자의 땅에서 끊어졌다.’ 그의 ‘무덤이 악인과 함께’되었느나(왜냐하면 그는 세 사람 중 가장 흉악한 죄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두 강도 사이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이다) ‘그 묘실은 부자와 함께 되었다'(왜냐하면 그는 존귀한 공회원인 요셉의 묘실 속에 장사되었기 때문이다).
(2) 이 일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면서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는 어떤 악을 범했는가?”라고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대적들은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라고 생각했다(4절). 그들은 그를 미워하여 핍박까지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신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는 ‘하나님에게 매를 맞았다'(10절). 혹은 비록 그가 매를 맞고 고난을 당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일의 의미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1) 그는 이와 같이 가혹한 대우를 받을 만한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국가에 반역을 하고 선동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않았고 오히려 선을 행하며 다니셨다. 그는 또한 사기꾼이라는 죄목으로 고소당했지만 ‘그 입에 궤사가’ 전혀 없었다(9절). 베드로전서 2:22와 비교해 보라. 그는 결코 말이나 행동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 그를 정죄한 재판관도 그에게 전연 죄가 없음을 인정하였고 또 그를 처형한 백부장도 그가 분명 의인이라는 것을 고백했다.
2) 그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않았다'(7절). 그는 자신의 무죄를 탄원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며 죽고자 하셨다. 위대하고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가 자발적으로 복종한 이 고난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치욕은 제거되었다. 그는 그의 지혜로 이 선고를 회피하고 또 그의 권능으로 이 처형에 저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록된 대로 고난을 받아야 했다.
그것은 그가 이 명령을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끌려갔다.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아니 “도살자 앞에서도 잠잠한 양같이” 끌려갔다. 그는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그가 그의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가 거룩히 구별받은 것은 그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의 생명 곧 영혼을 희생물로 바친 이 고귀한 공로 때문이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우리를 대신한 것이다. 이 내용이 본문을 통해 아주 명백하고 충분하게 주장되고 있다.
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모든 사람들은 각기 그 자신의 수많은 죄로 말미암아 기소를 받게 된다. 우리는 진정 양과 같이 잘못 행해 왔다. 양들은 아무데로나 가기 쉬우며 집으로 잘 돌아오지도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참된 특성이다. 우리는 각기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자기의 길로 나아감으로써 우리 자신의 뜻을 세워 하나님과 그의 뜻에 겨루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죄의 악한 특성이다.
② 우리의 죄는 바로 우리의 질고이며 우리의 슬픔이다(4절).
③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우리를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하고자 세우심을 입으셨고 또 그 임무를 수행하셨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킨 것은 그 죄를 우리에게서 없애기 위함이다. 즉 우리가 복음의 은혜에 순종할 경우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곧 속죄 제물)를 지실 때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처럼 그는 무거운 죄의 짐에 눌려서 자기에게로 나오는 자들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역량을 갖고 계시다(참조. 시 40:6-12).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지울 권세가 없다.
왜냐하면 그 죄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범해졌고 또 그리스도는 아무 죄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놓여짐 짐은 바로 ‘우리 무리의 죄악’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사람을 구속할 수 있는 많은 예물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예물은 스스로 배척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그런데 그가 성부께 동의하셨을까? 물론 그는 동의하셨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7절 말씀의 참뜻이 “그러이 강요되자 그가 응했다”라는 의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④ 그는 우리의 빚을 짊어지셔야 하기 때문에 그 형벌을 받으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4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우리의 슬픔까지도 당하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결코 심한 압박을 받지 않도록 우리에게서 그 죄를 거두어 가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의 죄는 그의 머리에 박힌 가시와 같고 그의 손과 발에 박힌 못과 같으며 그의 옆구리를 찌른 창과 같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의 죄악이 바로 그의 죽음을 초래한 원인이었다. 이것은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때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한 8절 말씀과 동일한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⑤ 그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는 평화와 치유이다(5절).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 2:14).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편안케 하고자 고난을 당하셨다. 이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치유를 받는다. 왜냐하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죄는 위법 행위를 나타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 죄는 또한 하나의 질병이며 이것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병을 치유해 주신다. 그는 채찍에 맞으심으로, 영혼에 이상이 생겨 발생된 우리의 타락을 극복케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성령과 은혜를 값주고 사셨다. 이는 우리로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케 하기 위해서이다. 이리하여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되고 우리는 그 병을 악화시키는 것에 대한 저항력을 갖게 되었다.
⑥ 그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결과는 그의 부활이었다. 그는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셨고 우리의 의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그는 부활함으로써 ‘다시 죽지 않으신다.’ 즉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롬 6:9). 죽었던 그가 다시 사실 뿐 아니라 영원히 사신다.
Ⅲ. 하나님의 뜻 53:10-12
앞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증거했다. 이제 본문에서 그는 그에 따른 영광을 예언하고 있다.
(1) 그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보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 보라.
1) 그는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고난에 복종하셨다(10절).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사람들은 그가 매우 큰 죄를 범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는다고 생각했다(4절).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2) 그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물로 드렸다.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는 친히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다고 설명해 주셨다(마 20:28). 우리는 우리 대신 그를 대속물로 삼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을 친히 대속물로 내주셨다.
3) 그는 자신을 우리의 죄의 삯으로 친히 내어 주셨다(12절).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그는 물을 버리듯 자기의 영혼을 버리셨다. 그는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을 버려야만 했기 때문에 자기의 영혼을 전혀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내어 주셨다.
4) 그는 친히 죄인들이 받는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내어준 것은 죄인들을 위한 중재자가 되기 위함이었다(12절).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 즉 그는 행악자로 정죄를 받았을 뿐 아니라 두 명의 악명높은 범죄자와 함께 처형되었다. 그것도 마치 그가 세 명 가운데 가장 흉악한 죄인이기나 한 것처럼 그들 가운데 끼여 처형되었다. 실상 그는 일생 동한 범죄자 가운데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안식일을 범한 자, 술취한 자,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등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범죄자들, 곧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그들을 용서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 외의 모든 다른 범죄자들까지도 용서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그의 기도는 보복이 아닌 긍휼을 구하기 위하여 부르짖는 그의 피맺힌 탄원이었다.
(2) 그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약속되고 있다.
1) 그는 그를 섬기고 그의 이름을 전할 시를 얻을 것이다(시 22:30). 참된 신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도록 그들을 그에게 주셨다(요 17:6).
2) 그는 살아서 그의 씨를 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들도 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3) 그는 몸소 이 가족의 일을 계속 돌볼 것이다. 그 날은 길 것이요(10절). 그리스도는 그의 가족의 보호를 어떤 자에게도 맡기지 않을 것이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할 것이다'(사 9:7). 이는 그가 영원히 사시기 때문이다.
4) 그의 큰 과업은 기대한 만큼 응답을 받을 것이다.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될 것이며 일점 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5) 그는 그 속에서 직접 풍성한 만족을 얻을 것이다(11절).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그는 그것을 미리 볼 것이다(그것은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그는 자기의 고난을 예상하면서 그 결실도 기대할 것이다. 그는 불쌍한 죄인들이 변화를 받고 구원을 얻게 될 때 그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를 세우는 것과 그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을 통하여 그의 영혼의 수고에 대한 복된 결실을 보고 계시며 또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음의 사실들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망으로부터 우리가 얻는 큰 특권은 죄로부터 의롭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멸망시킬 수 있는 죄로부터 면제를 받았고 또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값을 주고 우리의 의를 구해 주셨다. 즉 그는 우리를 위하여 중재를 하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증거케 함으로써 우리의 의를 구해 주셨다.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은혜의 언약에 동의하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참된 믿음도 있을 수 없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은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우리의 보증인이기도 하신 그와 관련되어 있다. 그가 하나님의 종과 우리의 보증인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위함이다. 그는 스스로 의로우신 분이며 우리가 받은 모든 의도 그의 의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그 자신이 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짐에 깔리지 않도록 우리를 구해 주셨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분명 성자 하나님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 “내가 그를 존귀한 자 가운데 두고 그를 매우 높이며 그에게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줄 것이다.” 그리스도는 정복을 통하여 영광을 누릴 것이다. 그는 군주와 권세자, 죄와 사단, 사망과 지옥, 세상과 육신을 정복하셨다.
이것들의 세력은 매우 강하지만 그는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그들의 이권을 빼앗아 버리셨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인도될 수많은 자발적이고 신실하며 충성스러운 그의 신하들에게 그 전리품을 나누어 주신다. 그러므로 12절의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라’한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많은 자들을 그에게 주며 그는 많은 자들을 전리품으로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열방을 유업으로 주며’ 그의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게’ 하실 것이다(시 2: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로잡은 자를 끌고'(시 68:18) 오셨을 때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을 사람들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