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장 매일 말씀] 생일을 저주하는 욥의 고백(욥3:1-26)

욥기 3장 매일 말씀은 생일을 저주하는 욥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욥이 사탄의 시험을 받으니 너무나 괴로워했다.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욥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를 알 수 있다. 욥이 사탄의 시험에 의해서 고통스러우니 차라리 죽음을 동경하고 있다.

Ⅰ.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욥 3:1-10

욥은 오랫동안 애태우고 있었다. 그가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 동안 마음은 더욱 뜨거워져 숨이 막히고 질식할 것 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욥과 그의 친구들은 생각하며 앉아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욥을 너무 슬프게 하지 않을까 해서 그들이 생각한 것을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했으며 욥은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봐 그의 생각을 감히 토로하지 못했다. 욥이 처음으로 자기의 생각을 토로하였다. 그는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1) 자신의 극심한 환난과 정신적 동요 때문에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것이 부분적으로는 합리화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그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제 욥은 자기가 태어난 복을 잊었다. 여윈 암소가 살찐 암소를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오직 재앙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차 있었고 그가 결코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선지자 예레미야 자신도 그의 재앙의 고통을 표현할 때에 이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내 모친이 나를…낳으셨도다'(렘 15:10).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다면…'(렘 20:14이하).

이 세상에서는 사람이 삶의 어떤 조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그 속에서(만일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그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며, 그 스스로 더 나은 행복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코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기를 원하기보다는 오히려 좋은 목적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후에 또 다른 인생이 없다면, 이 세상의 슬픔과 환난이 너무도 많으므로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허무하게 창조되었다”(시 89:47)고 말하며, 우리가 결코 태어나지 않았기를 원하도록 유혹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말에서 자연적인 생명보다 영적인 생명이 더 존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출생한 날을 저주했을지라도, 그들이 거듭난 날을 저주하는 자는 결코 없으며 그들이 받은 은혜와 그 은혜의 성령을 받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2) 욥은 자기의 태어난 날을 저주했지만 하나님을 저주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욥은 삶이 싫어져서 그의 삶을 기꺼이 포기했던 것이지, 자기의 신앙이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욥은 단단히 신앙에 매달렸고 결코 신앙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욥에 대해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욥이 결점들을 가지고 있느냐 혹은 우리처럼(부여받은) 정욕 같은 것에 지배를 받느냐 안 받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하나님을 은밀히 미워하는 위선자가 아닌가 하는 문제였다.

만일 그가 위선자였다면 충동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런데 시험의 결과 그는 그러한 위선자가 아님이 입증되었다. 그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데 사용한 상세한 표현들은 시적인 상상력과 정열과 환희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표현들을 상세하게 조사할 필요는 없다. 욥이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원하는 강렬한 표현을 한 것은 그 날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고 다음과 같은 것들을 원하는 것이다.

욥기 2장 설교말씀 사탄의 시험과 세 친구 방문

1) 땅이 그 날을 잊었기를 원하고 있다.

2) 하늘이 그 날을 싫어하였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4절). 한낮에 해가 진 그 날의 캄캄함은 욥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3) 모든 기쁨이 그 날을 버렸기를 원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더라면(7절). “그 날이 긴 밤이 되어 즐거움을 가져오는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9절).

4) 모든 저주가 그 날에 있었기를 원하고 있다(8절). “그 누구도 그 날 보기를 원하지 말고, 차라리 날을 저주하는 자들이 그 날을 저주하였더라면. 어떤 날이든지 저주하고 싶어하는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로 하여금 동시에 나의 생일에 대해 저주를 퍼붓게 하리라.” 욥이 슬픔 건너편에 있는 기쁨을 볼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슬픔을 보지 않기 위하여 눈으로 빛을 볼 수 없기를 원한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Ⅱ. 태어난 후 즉시 죽지 않았음을 한탄함 3:11-19

욥은 아마도 그가 결코 태어나지 않았었기를 바라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반성한 결과 그보다 조금 나은 바람으로써, 자기가 태어나자마자 곧 죽었더라면 하고 고쳐서 생각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욥은 목숨을 저주로 간주하여 한탄하고 있으며, 사망과 음부를 위대하고 가장 바랄만한 최고의 복으로 생각하여 몹시 원하고 있다. 사단은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는 격언을 욥에게 적용시켰지만 완전히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욥과 같이 생명을 천하게 여긴 사람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1) 욥은 배은망덕하게도 목숨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불평하고 있으며, 목숨이 그에게 부여된 즉시 자기로부터 제거되지 않은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다(11,12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올 때 얼마나 약하고 무력한 피조물이며 생명의 줄은 처음 나올 때 얼마나 가냘픈가!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얼마나 자비롭고 자상하게 돌보아 주셨는가! 얼마나 많은 공허와 번민이 인생을 찾아오는가!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섬길 하나님을 모시지 못했고, 저 세상에 대한 더 좋은 소망을 가지지 못했다면, 우리가 받은 능력과 둘러싸인 고난을 깊이 생각하면서 태에서 죽어 나왔기를 바라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든지 간에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가 태에서 죽어 나오거나 소멸되지 않은 것은 주님의 긍휼 때문이었도다.”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인류의 상식과 감정에 모순되며 때로는 우리 자신의 상식과 감정에도 모순된다. 어떤 우화에 무거운 짐 때문에 지쳐 버린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불만스럽게 그 짐을 내던지고 죽음을 불렀다. 그러나 죽음이 그 노인에게 와서 무슨 일로 불렀느냐고 물어보자 그 노인은 “아무 것도 아니올시다. 다만 내 짐을 도와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2) 욥은 사망과 음부를 열렬하게 성원하며, 매우 사랑하는 것같이 보인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 그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 위해, 죽기를 원하는 것은 은혜의 결과이며 증거이다. 그러나 단지 음부에서 편히 쉬고 이 인생의 고통에서 떠나기 위해 죽기를 원하는 것은 부패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욥은 여기에서 그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더라면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어지럽힌다. “그랬으면 나는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라고 욥은 말한다(14절).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에게는 화려함과 권세와 책략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그들을 사망에서 건져내지 못하고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무덤 속에서 그들의 몸이 모든 티끌로부터 구별되게 할 수도 없었다.

비록 그들의 집이 은으로 가득차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들을 남겨두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더욱이 다시 돌아올 수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왕들과 의사들이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했다’는 이 구절을 보고, 그들이 생전에 그들 자신을 위해 묘실이나 기념비를 마련해 두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그 왕들이 가졌던 금과 그들의 집을 가득 채웠던 은은 고귀한 자들의 무덤 속에 넣어두던 보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면 죽음 저편에서도 그들의 권위를 보존시키고 그들을 낮은 부류의 사람들과 구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죽음은 만민에게 평등하게 임한다.

다시 말해서 왕과 농사꾼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16절) 즉, 전혀 빛을 보지 못하였거나 단지 눈을 떠서 이 세상을 잠깐 보고는 세상이 싫어서 다시 감아 버리고 급히 떠난 아이도 편하고 안온하게 누워 있으며, 금을 가졌던 왕들이나 의사들이나 방백들과 마찬가지로 높고 안전하게 누워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상의 잿더미 위에 누워 있기보다는 차라리 그곳에 있는 티끌 속에 누워 있겠노라! 그렇게 했더라면 지금쯤 누워서 평안히 쉬고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지금 그렇게 할 수 없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으며, 여전히 시달리면서 불안해하고 있도다. 지금은 내 눈에서 잠이 떠났으나 그렇게 했더라면 내가 자고 있었을 것이요, 지금은 내가 쉬지 못하나 그렇게 했더라면 내가 쉬었을 것이라.”

이제 우리는 복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보다 훨씬 더 생명과 불멸에 대한 신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므로 죽음에 대해서 보다 확실한 것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불쌍한 욥이 꿈꾸던 것은 오로지 나쁜 소식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심한 상처의 아픔에서 벗어나 무덤에서 조용히 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쉬었을 것이니. 욥이 얼마나 훌륭하게 무덤의 휴식을 묘사하고 있는가! 지금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거기에서는 고난에서 벗어날 것이다(17절). 거기서는 약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지금 수고하는 자들이 거기서는 자기들의 수고가 끝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서는 곤빈한 자가 평안을 얻으며. 이 세상에서 사로잡힌 자들은 저 세상에서는 놓임을 받을 것이다. 죽음은 갇힌 자들을 놓아주고 압제 당하던 자들을 구출해 주며 종을 해방시켜 준다(18절).

열왕기상 1장 성경주석말씀 솔로몬이 왕이 됨

Ⅲ. 목숨이 유지되는 것을 원망함 3:20-26

욥은 여기에서 자기의 목숨이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1) 욥은 비참한 생명이 연장되는 것은 가혹한 일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20-22절).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생명은 불이라고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불은 걸어갈 때나 일하는 데에 귀하고 유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촛불과 같다. 왜냐하면 촛불은 오래 탈수록 점점 더 짧아지고 촛대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이 빛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기록되고 있다.

욥은 이 빛을,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자기들 자신의 비참함을 보게 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 빛이 선물 아닌 선물인 것으로 생각했다. 욥이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즐거움과 유용함과 사라진 후에도 살아남게 되고, 나이와 노쇠, 고통과 병, 가난과 치욕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게 되었는데도 죽음이 오지 않으므로 죽기를 갈망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죽음을 두려워하여 멀리 피하려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찾아온다. 생명의 지속과 마침은 하나님의 섭리로 되는 것이지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 그리고 언제 죽을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우리의 일생은 우리보다 더 훌륭하신 분의 손안에 있다. 이러한 자는 죽기를…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 하다가(21절). 즉 그들은 이 세상을 깨끗이 떠나기 위해서 어떤 것이라도 지불하려는 자들이다. 죽음을 갈망하는 것은 죄가 될 것이나, 하늘 나라를 사모하는 것은 죄가 될 리가 없다.

(2) 죽음으로도 자기의 고통과 비참함을 안락하게 할 수 없다면 다른 것으로는 더욱 힘들 것이라고 욥은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당하는 고통으로 인해 생명을 포기하려는 것은, 단지 생명 그 자체에 대해 배치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주신 분에게 대해서도 배은망덕한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의 큰 즐거움 속에서 기꺼이 죽는 법과 큰 환난 속에서도 기꺼이 사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욥은 삶의 위안을 갖지 못했다.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24절). 욥의 근심은 식사처럼 규칙적으로 그에게 찾아왔고 고통은 욥의 매일의 양식이었다. 그는 자기의 형편이 나아지리라는 전망을 가지지 못했다.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23절). 지금 욥의 근심을 더 극심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징벌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셔야 할만큼 하나님을 격노케 하도록 그가 형통하던 날에 나태했거나 소홀했던 적이 있는지 깨달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욥은 그러한 고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경계를 하였다.

욥은 그의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 때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을까 두려워하였고(1:5), 그의 종들이 그의 이웃들에게 잘못을 범하였을까봐 염려하였다. 욥은 자신의 건강에 대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온갖 관심을 다 기울였지만 모두 다 허사였다. 그가 방심하지 않았고 스스로 안이와 편안함 속에 빠지지 않았는데도 고난이 임하였다. 이와 같이 욥의 길은 숨겨져 있어 아득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왜 그와 다투시는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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