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의 헬라어 원어성경말씀은 예수님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했다. 요한복음 6장은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속사람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우리는 항상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
1. 썩는 양식과 영생하는 양식에 관한 교훈
요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자니라 –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력(靈力)을 가리킨다. “인자”는 인성(人性)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바 그가 살과 피를 희생하셔서 속죄하여 주시므로 영적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게 된다. “인 치셨다”는 뜻은,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시고 인정하시고 신임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구주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높다는 참람한 죄악이요,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이로 여기는 죄악이다.
요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 여기 이른 바, “하나님의 일”이란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하나님의 일들”이란 뜻이다. 이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곧,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을 오해하여, 영생의 대가(代價)로 많은 인간적 업적을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더러 일 하라고 하신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가 말씀하신 “일”이라는 것은 신앙을 의미하였다.
신앙은 일 아닌 일, 곧, 그리스도 안에 안식함이다. 유대인들은 저렇게 인간의 힘으로 어떤 고등 노동들(하나님의 일들)을 하므로 영생을 얻고자 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들”이라고 복수 명사를 사용하였으니, 일의 수량에 의하여 문제 해결을 보려고 한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어떤 고등 노동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어리석다. 사람들은 오직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다(29절).
요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신앙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신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인간에게 믿음을 가르친다. 특별히 우리 본문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일들이 아님)하심은, 의미심장하다. 여기 단수 명사로 된 “일”(에르곤)은 “그 일”이란 말인데, 모든 다른 일들 곧, 율법적인 일들과 엄격히 구분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일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무슨 내용을 가진 신앙인가?
그것은, (1) 하나님을 신임하는 믿음,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임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이다. (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살아 계신 신(神)이심을 믿음.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성육신(成肉身)하여 보내신 것은, 인간과 깊은 교제를 가지시기 위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리신 무의 무정(無意無情)하신 이로 오해하는 자이다. (3) 하나님 자신을 인간의 눈과 귀로 친히 보며 듣는 것과 같이 믿음.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 자신을 받아 가진 자이니, 그로서는 하늘의 하나님을 보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만일 전적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일어난다면, 세상의 역사는 변화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펄죤(Spurgeon)은 말하기를, “작은 믿음은 영혼을 하늘로 가져가고, 큰 믿음은 하늘을 영혼에게 가져온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남들의 권면을 받지 않고도 믿었고 (창 18:9-15; 롬 4:19-21), 수로보니게 여자는 하나님의 권면 없이도 믿었고(마 15:22-28), 노아는 경험한 바 없이도 홍수에 의하여 세상이 망할 것을 믿었다(히 11:7).
2.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
요6: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 일찍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곧, 신학적 문제에 접촉하였고, 이제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문제 곧, 구원론에 접촉하여 각각 불신앙을 나타냈다(Godet). 예수님께서 자기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시는 “표적”을 행하셨으나, 그들은 그것을 통하여 표적다운 내용을 보지 못하였다.
고데이(Godet)는 말하기를,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할 때에 그의 거절하신 태도로 인하여 그들은 낙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메시야 아닌 줄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표적을 찾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격이 이 세상의 정치적 임금이 아닌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시말 하면,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의 무리에게 먹이신 표적(메시야 표적)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으니, 유감스럽다(26절).
요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셨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 출 16:15; 시 78:24 참조. 저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인용한 것을 보니, 그들은 지도자들이었든지, 혹은 서기관인 듯하다(Belser). 그들은, 메시야가 온다면 또 다시 만나를 내려 먹게 해 줄 것으로 잘못 알았다(Midrash Koheleth, P.73).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여 주시기를 간접적으로 청원한 것이다.
요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을 쓰실 때에 만나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신령한 떡,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로써 옛날의 물질적인 떡 곧, 만나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저 유대인들은, 만나보다 더욱 위대하신 떡(“참 떡” 곧,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음에 대하여 불신앙했으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요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여기 “하나님의”(*)란 어귀가 강세(强勢)를 띤 말이라고 한다(Goebel). 그렇다면, 이 어귀가 그 “떡”을 가리켜 그 영성(靈性)과 그 영원성과 생명성과 및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고조한다. “하늘에서 내려”란 말씀이, 이 부분 예수님의 교훈에 일곱 번 나온다(33, 38, 41, 42, 50, 51, 58).그 만큼 이 말씀은 역설체(力說體)로서 그 떡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준다.
곧, (1)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인 만큼 광범위한 세계에 분배된다. (2)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 불멸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만나는 영양을 줄 수 있었으나 하늘 떡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3) 만나는 보이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나, 생명의 떡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내려온다(Calvin). (4)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란 말의 헬라 원어(카타바이노)는, 현재 분사로서 계속적으로 내려오는 활동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양식은 사실상 모든 시대를 통하여 끊임없이 내려온다.
요6: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이것은, 또 다시 유대인들의 불신앙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 떡”이 육신의 양식인 듯이 오해하고 욕심을 부린다. 여기서 그들은 그것을 “항상” 주시기를 청원한다.
요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1)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 먹는 행위와 같이 실제적이어야 할 것을 암시하심이다. 믿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다. 먹음으로 우리의 주린 것을 멈추는 것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영적 기갈이 멎어진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는 것처럼 믿어 그를 내 분깃으로 섭취해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이론만 알고 그를 내게 섭취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큰 곡창(穀倉) 문 앞에서 굶어 죽는 것과 같은 가석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음식 먹기를 계속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일을 계속해야 된다. 작년 이 때 먹은 것이 오늘의 굶주림을 멈추어 주지 못한다. 신앙 생활을 먹고 마시는 행동에 비유한 것은, 성경에 많이 있다. 사 55:1에도 말하기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였다. 계 3:20, 22:17 참조. (2) “내가 곧 생명의 떡”이란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신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이시란 뜻이다. 그는 주시는 자시며, 또 주시는 선물 자체도 되신다(Zahn).
그 자신이 대제사장인 동시에, 자신이 제물도 되신다. 그를 믿는 자는, 그의 속죄제의 효과를 받아 누리며 따라서 그와 일체(一體)되도록 밀접히 연합하게 된다. 그가 자기를 떡에 비유하신 이유는, 음식물은 그 먹는 자와 밀접하게 연합하여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오는 자”란 말과 “나를 믿는 자”란 말은, 서로 병행하여 동일한 뜻을 가리킨다.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지향한 영적 동태(靈的動態)를 말함이고, 믿는다 함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합해 있음을 가리킨다(Grosheide,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439).
요6: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26절의 내용에 암시 된 뜻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늘 것을 본다고 반드시 믿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는 것이 믿는 데 이르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더욱 복되다(요 20:29). 벧전 1:8-9 참조.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 귀절들은 (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의 이유가,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권위가 부족한 탓이 아니고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 (2) 믿는 자들은 그들의 의지력(意志力)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니 만큼, 그 구원이 확고 불변하다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소유한 자는, 그것을 소유한 것이 벌써 확실한 구원 소유인 줄 알고 위로를 받는다. 딤후 1:12에 말하기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하였고, 빌 1:6에도 말하기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하였다.
위대한 신앙가요 과학자인 미카엘 파라디(Sir Michael Faraday)는, 임종시에 어떤 사람들이 “당신의 영혼이 장차 어떻게 되겠다고 추측합니까?”하고 물을 때에 그는 대답하기를,”추측? 나는 추측에서 살지 않는다. 나는 확신에서 살고 있노라”고 하였다. 어떤 성도는 늘 기쁘게 노래하기를, “나는 가련한 죄인이고 그밖에 아무 것도 아니로라. 그러나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우리의 신령한 체험이나, 혹은 도덕 생활에는 굴곡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죄인인 사실은 변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신 사실도 변치 않는다.
혹시 우리의 도덕 수준이 올라갔다 해도 죄인임을 면치는 못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 밖에 없다. 히 13:8에 말하기를,”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였다. 진실한 성도들은, 끝까지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건다. 해버갈(Havergal)이란 성도는, 임종시에 자기 친구더러 사 42장을 읽어 달라고 하였다. 그 친구가 읽을 때 그는 6절 말씀에서 주의를 시켰다. 곧,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한 말씀이다. 그는 이 말씀에서 “불렀다”는 말씀, “손을 잡았다”는 말씀, “보호한다”는 말씀을 맏고 세상을 떠난다고 고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