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0장 복음 설교 말씀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말씀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니 하나님은 심판할 수밖에 없다. 거짓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Ⅰ. 포로된 자들에 대한 경고 10:1-16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기에서 이교도의 우상 숭배에 대항하여 백성들을 무장시키고 있다. 이는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고 바로잡음으로써 채찍을 맞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쓰여졌다.
(1) 이방인의 길을 좇지 말라는 엄중한 권면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어야 했다.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그것을 인정하지도 말고 그것에 대해 심상히 여기지도 말라. 그들의 관습 중 어떠한 것도 너희 가운데 침투치 못하게 할 것이며 그것을 너희의 신앙과 혼합시키지도 말라.” 하늘의 주인들, 곧 태양, 달, 별들을 섬기고 그것들에 신적인 영예를 돌리며 그것들에게서 신적인 은혜를 기대하는 것이 이방인들의 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고’ 별들을 신으로 경외하며 천체의 징후로 인해 놀라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온 하늘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 궤도를 따라 가는 별들은 하나님과 화평한 어떠한 것과도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2) 이 권면을 따라야 하는 몇 가지 합당한 이유가 제시된다.
1) 이방인의 길은 불합리하며 올바른 이성에 의해서도 정죄된다(3절). 이방인들의 법령과 규례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모든 이웃 나라들보다 뛰어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선지자는 그들은 물론, 우상을 섬기고 그 우상들로부터 도움을 기대하는 모든 다른 민족들은 상식을 결여한 자들임을 보여 준다. 어떠한 우상이 섬겨지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그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였으며 ‘공장의 손’에 의하여 잘라지고 깎여서 인형으로 새겨진(사 44:13이하)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나무 토막에 지나지 않으며 차라리 문설주로 쓰여지기에나 알맞았다.
따라서 단순한 나무에 불과함을 감추기 위하여 그것들은 은과 금으로 꾸며졌다. 쓰러지거나 도둑맞지 않도록 ‘못과 장도리’로 그 세워진 자리에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고정되었다(4절). 형상은 꼿꼿하게 세워졌다. 장인이 제 할 일을 다한 덕분이다.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5절). 그것은 당당하고 위엄있게 보이며 마치 금방 말이라도 하려는 듯한 자세로 서 있으나 그것은 ‘말도 못하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옮겨질 필요가 있다면 사람이 메고 가야만 한다.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또한 그것을 노엽게 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따라서 그것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금이나 은으로 된 우상들도 나무로 만들어진 신들과 마찬가지로 섬길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8절).
그것은 나남에 대한 거짓말을 가르친다. 그것은 허망한 것들의 가르침이요, 나무일뿐이다. 거기에는 온갖 기술과 많은 수고가 투입되었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고용되는 자들은 평범한 기술자가 아니다(3절). 그들은 기술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공교한 사람의 만든 것’이다. 그것이 ‘장색의 손’을 거치고 나면 또 조각사가 정성을 기울여 그것들을 조각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청색 자색 감으로 그 옷을 삼아’ 왕과 같이 존중되어졌다(9절). 청색과 자색은 제왕의 의복에 사용된 빛깔이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만들어진 우상인 이상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14절). ‘우상은 거짓 것이요,’ 가장되어 꾸며지고 있는 그 상태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람에게 호흡과 생명과 감각을 주는 신들로 섬겨지고 있지만 그것들 자체가 생명이 없고 감각이 없는 존재이다.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에게는 영혼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어떤 신령 혹은 신성을 지니고 있지도 못하다. 그것들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혼’조차 가지지 못했으며,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이다'(15절). 그것들은 미혹된 환상의 소산들이며 이러한 우상들을 섬기는 숭배자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다(8절). 그들은 창조의 역사에 있어서의 창조주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성을 깨닫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 생각이 허망해진’ 사람들이다(롬 1:21,28).
2)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유일하게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와 겨루어 어떤 다른 신을 세운다는 것은 그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모욕이다. 선지자는 이방인의 우상에 대하여 극도로 경멸하면서 이야기하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지극히 깊고 두려운 경외심으로 말머리를 돌린다(6,7절). 세상의 창조주요 사람의 영혼을 불어 넣으신 분의 영광에 비하면 유익한 기술을 발명해내거나 융성하는 왕국을 세우는(이방인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인간을 신격화시키는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인간의 영광은 얼마나 초라한가.
‘열방의 왕이신’ 그분의 영광에 비하면 유4대하다고 하는 이세상의 군주나 권력가의 영광이 무엇이겠는가? 선지자는 이와 같이 고백한다(6절). 여호와여…주는 크시니. “주는 무한하시고 광대하시며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인하여 크시니이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크신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섬겨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족속들도 그를 ‘열방의 왕’으로 경배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의 진실성은 우상의 헛됨 만큼이나 자명하다(10절). 우상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지만 진리의 하나님은 진리 가운데 계시다.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생명 그 자체이시며 자기 안에 생명을 지니신 분이고,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다. 이방인들의 신들은 생명이 없는 물체에 불과하나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불멸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영원한 왕이시오’, 영원의 왕이시다. 비록 온 열방들이 함께 힘을 합하여 뭉친다하여도 그를 저항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그 분노하심을 능히 당치 못할’ 것이다. 그는 온 자연의 하나님이시오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다. 자연이 지닌 모든 힘들은 그의 명령을 따른다(12,13절). 가만히 둘러보면 온 세상이 제일 원인되시는 그에게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심지어 헬라인들 사이에도 “딴 신으로 자처하는 자는 응당 먼저 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만물을 지으셨다. 땅은 그 내부에 값진 보화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 표면에는 보다 귀한 소산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그 권능으로 지으셨다.’ ‘땅을 공간에 다신’ 것은(욥 26:7) 다름 아닌 바로 그의 무한한 권능이었다. 지상에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은 사용하고 일하기에 놀랄 만큼 적합하다.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는 ‘명철로 하늘들을 훌륭히 펴셨으며’ 천체의 운행을 아래 세상에 유익하게 지시 하셨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이 아니라 그 하늘을 만드신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위를 바라보면 그의 섭리가 계속되는 창조임을 알게 된다(13절).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이물은 지상으로 쏟아진다.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온 땅은 비의 축복을 받고 땅 끝에서부터 수증기, 곧 구름이 하늘로 오른다. 그리고 대기 속에 있는 수분은 나라 안의 화폐나 신체 내의 혈액처럼 전체의 유익을 위해 끊임없이 순환한다. 어떠한 기상 상태이든 우리에게 위대하신 창조주의 지혜와 권능을 입증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들은 그와 가까이 있어야 마땅하며, 우상을 섬기고자 그를 버려서도 안된다. 야곱의 분깃은 우상들과 같지 아니하기 대문이다(16절). 이스라엘의 반석은 그들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며(신 2:31), 그들의 흙 두둑과도 같지 아니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분깃으로 만족해 하면 그는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여기시고 은혜로이 기뻐하실 것이다. 즉 우리를 ‘그의 산업의 지파’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로 말미암아 섬김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저희의 하나님이 ‘만물의 조성자’이시라는 사실은 여호와의 모든 백성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안이다.
3) 이와 같이 이방인의 신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비교함의로써 선지자는 저들 모든 우상들이 파국의 운명을 알려 주며 아울러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사실을 우상 숭배자들에게 알려 주라고 지시하고 있다(11절).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신을 섬기도록 강요받았을 때, “그로 세상을 만들게 하라. 그러면 나의 하나님 의로 섬기리라”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자들과 셈하기 위해 오실 대에 그들로 하여금 저희 우상들에게 염증나게 만드실 것이며 기꺼이 그것들을 내던지도록 만드실 것이다. 그것들은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져질’ 것이다(사 2:20).
Ⅱ. 남은 자들에 대한 경고 10:17-25
(1)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임박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파멸을 경고한다(17,18절). 일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간 뒤 자기 땅에 남아 있던 유다인들은 매우 안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요새로 ‘에워싸인 가운데 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즉 저희의 나라가 견고하여 공략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의 동포를 좇아 떠날 채비를 하여야 했고 가재 도구를 꾸려야 했다. 네 꾸러미를 이 땅에서 수습하라. “할 수 있는 한 네 짐을 줄여서 조그만 보퉁이로 꾸려라. 네가 지닌 것을 흩어지지 않게 하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도한 판결의 집행자인 갈대아인들이 다시 덮칠 것이기 때문이다(18절).
보라 내가 이 땅에 거하는 자를 이번에는 내어 던질 것이라. 그들은 지금까지는 한번에 조금씩 떨어져 나갔었다. 그러나 이제는 투석기로 튕겨진 돌처럼 내던져질 것이며 단시간 내에 먼 곳으로 거칠게 내 쫓겨질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이 덧붙이신다.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계속하여 곤혹스러운 일과 괴로움을 당할 것이며 결국에는 그들이 믿으려고 하지 않았던 일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곧 자신들의 파멸이 되리라고 들었었다. 이제 그것이 사실임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2) 선지자는 백성들 가운데서 그들의 재난을 슬프게 애곡하고 있다(19절). 슬프다 내 상처여. 혹자는 이것을 선지자 자신의 애곡으로 해석한다. 물론 그 자신을 위한 애곡이 아닌 자기 조국의 재난과 파멸로 인한 애곡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몸으로 간주되어 한 사람처럼 말하는 백성들의 말로 해석되어질 수가 있다. 선지자는 그들이 의당해야 할 말들을 그들의 입에 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려고 하든 말하지 않으려고 하든, 그들에게는 그렇게 말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슬프다 내 상처여, 나는 두려움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아픔으로 인해서 슬퍼하노라.”
그것은 경상이 아니라 ‘중상’이다. 그것을 불평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가(할 수 있은 한) 참아야 하리로다. 이것은 순리에 따른 인내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부득이한 인내이다. “이는 재앙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선한 생각들이 결핍되었음을 드러낸다. 하나님께 대한 선한 생각이라 함은 우리가 고난에 처해 있을 때조차도 항상 지녀야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실 수 있으며 행하실 것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기쁘신 대로 행하옵소서”라고 내맡길 수 있든 생각을 의미한다. 나라는 황폐해졌다(20절). 내 장막이 훼파되고. 견고한 성읍처럼 보였던 예루살렘은 이제 연약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정부는 붕괴되고 나라는 조가 조각 부숴졌다. 교회는 훼파되었으며 그 버팀대가 되던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교회와 국가, 도시와 지방에 걸쳐 모두 파괴되었으며 이렇게 파괴된 것을 수선할 사람도 없었다.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어떤 자녀는 도망가고 어떤 자녀는 살육당했으며 또 다른 자녀는 포로로 끌려갔도다.” 내 장막을 세울 자가 다시 없도다. “그 일을 해줄 자녀들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도다.” 통치자들은 폐허화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어떠한 적절한 대책도 강구하지 않는다(21절). 목자들은 우준하여. 장막, 곧 목자들의 장막이 훼파되었을 때 그것을 돌보는 일은 목자들의 할 일이었으나 이들은 우둔한 목자들이었다. 그들이 왕과 방백들은 공중의 안위를 전혀 생각지 않았다. 제사장들, 곧 하나님의 장막의 목자들은 신앙을 훼파하는 일에는 많이 이바지했으면서도 그 재건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심판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구원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형통치 못하여. 즉 백성의 안전을 위한 저희의 어떠한 시도도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모든 길에서 기도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자들은 형통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적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은 매우 두려운 것이었다(22절). 크게 떠드는 풍성이오니. 처음에 귓속말로 전해지던 소문은 널리 퍼졌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소문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 풍성은 ‘북방에서부터’ 일어나 ‘유다 성읍들로 황폐케 하여 시랑의 거처가 되게 하리라’고 위협한다. 그들은 갈대아 군대의 탐심과 광포의 희생물이 될 것을 각오해야만 하였다.
(3)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무런 효과도 없음을 깨닫고 말머리를 돌려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
1) 선지자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절대성과 그 주권을 인정한다(23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재량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 아래 사는 것이다. 세상일은 종종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혹자는 이 말씀을, 갈대아 군대의 길도 그들 자신에게 있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 이상은 결코 행할 수 없다는 말로 해석한다. 즉 하나님은 이 교만한 물결에게 한계를 정하시고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라”고 이르실 수 있다는 것이다.
2)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면제되어 이스라엘 위에 떨어지지 않게 되기를 탄원하고 있다(24절). 그는 자기만을 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우둔함을 몰아낼 정도로만 하시되 그 징계도 여호와의 사랑으로부터 나오게 하시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하시며 우리로 없어지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로 본향이신 여호와께 돌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죄의 대가대로 징계하지 마시고 여호와의 은혜로우신 계획대로 징계하옵소서.” 우리는 스스로가 징계를 필요로 하며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 한,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만큼 경책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결코 징계받지 않게 해달라고 믿음으로 기도할 수 없다.
3) 그는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기를 탄원하고 있다(25절).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이 기도는 악의나 복수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이다. 마치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여호와여, 우리는 주의 진노를 야기시키는 백성이나이다. 하지만 주의 진노를 야기시키는 백성이나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다른 민족들도 있지 않사오니이까?
우리는 주의 자녀인고로 아버지의 징계를 기대하나이다. 그러나 저들은 주의 대적이오니 주의 진노는 우리에게가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이까?” 열방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방인들이며 또한 그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며 저희 가운데에는 신앙이라고는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굶주린 자들과 같은 탐욕으로 ‘야곱을 씹었다.’ 야곱을 씹어 삼켜 말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 즉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당, 혹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인 성전을 황폐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