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5장 설교 말씀] 내 누이 내 신부야(아5:1-16)

아가서 5장 설교 말씀은 신랑이 신부를 부르고 있다. 내 누이 내 신부를 부르면서 혼인 잔치에 초청하고 있다. 신랑이 신부를 찾아가서 문을 열어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부는 금방 문을 열지 않고 자기 일을 하다가 결국 신랑이 떠나고 말았다.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신랑은 사라지고 없었다.

Ⅰ. 그리스도가 교회의 초청을 받아들임 5:1

이것은 4장 마지막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오기’를 간구하던 교회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서 그는 그 초청을 수락한다. 신부는 그를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그녀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 대답으로 그는 그녀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라고 부른다. 그리스도를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자’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또한 그리스도로부터 가장 가깝고 사랑스러운 자들이라고 인정함을 받을 것이다. 신부는 그에게 자기의 동산에 들어오라고 초청하였고 그는 들어왔노라고 대답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사람들은 그가 어느 사이엔가 이미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니은 그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자신의 백성들과 만나주시고 그들을 축복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출 20:24). 신부는 그가 오로지 동산의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바랐지만, 그는 더 많이 가져오셨다. 즉 꿀, 포도주, 젖 등 풍성한 영양이 있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땅인 가나안의 소산물이었다. 인간 속량의 위대한 역사와 풍성한 은혜의 언약 등은 주님 예수께 잔치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잔치가 되어야 한다.

Ⅱ. 신랑을 잃은 신부의 슬픔 5:2-8

이 사람과 기쁨의 찬가 중에서 우리는 슬픈 장면을 접하게 된다. 신부가 여기서 하는 말은 사랑하는 자에게 하는 말도 아니요, 그에 관해 하는 말도 아니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잘못된 행동을 자탄하는 슬픈 이야기이다.

(1) 그녀는 게으름에 빠졌다. 내가 잘지라도. 이 말은 경건한 사랑이 식었고 의무를 점점 등한시해서 태만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참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신앙 생활이 항상 생기있고 발랄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은혜는 계속 남아 있으며 움츠러들 줄 모른다.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본심은 그런 것을 견책하여 나태함으로부터 끊임없이 나를 깨워 일으키나이다. 내가 잠이 들었으나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잠이 아니요, 나는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였나이다. 그런 게으른 자리에 있는다는 것은 내게도 편치 않았나이다.” 우리는 영혼이 병들거나 잠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동산에서 그가 가까이 있을 때에 우리가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슬퍼하고 부끄럽게 생각해야만 한다.

박사학위논문 구약성경 복음 중심 해석학 연구

(2) 신부가 이렇게 게으름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부르신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2절). 그녀는 그것이 사랑하는 자의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는 그녀의 마음이 깨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소리를 듣고 있었으나 어린 사무엘처럼 그가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소리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를 깨우사 들어오시려고, 즉 그를 우리가 맞아 들이도록 하시려고 문을 두드리신다. 그는 말씀과 성령으로 두드리시고 고난을 통해 두드리시며 또한 우리의 양심을 통해 두드리신다.

그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들을 부주의 속에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깨우시고 나무라시며 심지어는 매질까지 하실 것이다. 그의 부르심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보라.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문열어다오. 그는 만일 원하거든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하신다. 그 문을 두드리신 것이다. 그는 그녀를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호칭으로 부르신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그는 절대로 험악한 호칭을 쓰지 아니하신다. 그는 결코 사랑하시는 자비를 잃지 않으실 것이다.

문 열어다오. 그와 같은 친구, 그와 같은 손님에게 우리가 어찌 문을 안 열어 줄 수 있으랴. 그는 가난한 나그네가 하룻밤 묵어 가기를 간청하듯이 간청하였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내가 너를 보기 위하여, 즉 이와 같은 조그만 친절을 네게 받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생을 감수하였는지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셨을 때 그의 머리는 곧 ‘이슬이 가득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사랑에 보답함이 당연하지 않은가?

(3) 신부는 이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미루면서 다음과 같은 핑계를 댄다(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그녀는 반쯤 잠들어 있었다. 소리가 들릴 때에 그 소리가 사랑하는 자의 소리인 줄은 알았으나 마음속으로는 별로 그를 맞아 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옷을 벗고 있었고 이미 ‘발을 씻었다.’ 따라서 다시 발을 닦을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찮은 핑계의 말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만연해 있는 게으름을 표출하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그럴 마음이 없다, 그럴 힘이 없다, 또는 그럴 시가니 없다는 핑계를 대곤 한다.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자들은 그를 위하여 찬바람을 맞거나 따뜻한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생기지 않을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녀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일어나 사랑하는 자에게 문을 열어 줄 마음을 일으킨다. 설득으로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데 실패하자 그는 기다림에 지쳐서 문고리를 따기 위해 손을 넣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 밀매(4절). 이것은 성령께서 사랑하는 영혼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암시해 준다. 마음을 여는 것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는 루디아의 개심이라고 볼 수 있다(행 16:14).

(5)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시자 결국 그녀는 문 열기를 승낙한다. 나의 마음이 동하여서. 그녀는 사랑하는 자에 대한 동점심에 가득 차서 마음이 움직였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의 머리털에 밤이슬이 가득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다시 사시지 않으셨던가? 우리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그를 받아들이고, 또한 그를 위하여, 그가 사신 바 되는 사람들이 고난 중에 빠질 때면 언제든지 그들을 돕자. 그는 그녀의 게으름과 둔함을 부끄럽게 만들었다(5절).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그것은 그녀 스스로 결정한 행동이었으나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그녀 안에서 역사하신 것이다.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 위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1) 그녀가 빗장을 열기 위해서 문으로 갔을 때 거기서 이것을 발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사랑하는 자가 ‘틈으로 손을 들이’ 밀었을 때 그가 자기가 왔다 갔다는 증거로 거기에 놓아두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한 영혼에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 그는 그 영혼 안에 축복의 달콤함을 남겨 주신다.

2) 또는 그녀가 그것을 들고 갔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녀가 그에게 문을 열어 주기 위해서 문으로 갈 때 그녀는 그를 맞이하여 그의 머리에 그것을 부음으로써 그에게 새 힘을 주고 평안함을 주기 위해서 그 향료를 들고 갔다는 것이다. 그녀는 너무 급하게 서둘렀기 때문에 평상시와 같은 접대를 할만큼 시간이 없어서 손을 향료병에 한번 담갔다가 그걸로 그의 머리에 충분히 발라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그대로 갔던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마음의문, 즉 영원한 문을 열어 주는 사람들은 믿음이나 기타 다른 생생한 체험을 하고 열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체험으로 그에게 기름부어 주어야만 한다.

(6) 그녀는 사랑하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었을 때 그가 이미 없어진 것을 보고 낙담하고 실망한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6절).

1) 그녀는 그가 처음 문을 두드렸을 때 열어주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늦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찾을 수 있는 동안에 찾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때를 놓친다면 우리의 길을 잊어 버리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연히 우리의 게으름을 책망하시고 의무를 태만히 한 자들에게 위로의 대화를 그만두실 것이다.

2) 그녀는 여전히 그를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면서 날이 아무리 어둡고 안개가 끼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의 관계를 그만두지 않겠노라고 결심한다. 이제서야 그녀는 그가 처음에 자기를 불렀을 때 했던 말들을 기억해 본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즉 “그가 ‘내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였다’고 말할 때 그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으나 여전히 나는 누워서 핑계만 대고 열어 주지를 않았구나.” 그녀는 그를 찾으러 나섰다.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진정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도 그리스도의 미소를 바라는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못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심으로써 계속 찾을 수 있게 만드심으로 또 다른 응답을 하신다(시 138:3). 사도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없애려는 기도에는 응답을 얻지 못하였으나 대신 자신에게 족한 은혜로 응답받았다. 그녀는 행순하는 자들에게서 난폭한 폭행을 당하였다.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7절).

디모데전서 1장 설교말씀 이단과 이단 사상에 대한 경계 말씀

그들은 그녀를 음탕한 여인으로 간주하여 그렇게 대하였다. 마찬가지로 슬픔에 잠긴 성도들은 죄인으로 몰려서 심한 비난과 질책을 당하기도 한다. 그녀는 직접 탐문하러 다닐 수 없게 되자 주변의 도와 줄 만한 사람들에게 부탁한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8절). “내 친구들과 동료들이여, 그를 만나거든 나를 위하여 좋게 말하여 다오. 내가 사랑으로 인하여 병에 걸렸다고 전해 다오.”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병에 걸리는 것이 이 세상을 사랑함으로 누리는 평안보다 낫다.

Ⅲ. 사랑하는 자의 형상 5:9-16

(1)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그녀가 부탁한 것에 대하여 반문한다(9절). 그들이 신부에게 부여한, 이 감탄할 만한 호칭을 주목하라.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회이며 성소의 아름다움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거룩함과 더불어 좌우에서 영혼을 빛내 준다. 예루살렘의 여자들처럼 그리스도와 거의 관련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에게서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 대한 그녀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혹자는 이 질문이, 그녀가 그를 찾으려고 그렇게도 야단 법석을 떠는 것을 비난하면서 하는 경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육체에 속한 마음들은 우리 주님 예수에 대해서, 혹은 그의 인간됨이나 사명에 대해서, 혹은 그의 복음이나 자비하심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점이나 뛰어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이 질문을 매우 진지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 질문을 했던 사람들은 그녀가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한다면 활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여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질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이 신부로 하여금 그렇게도 안절부절 못하면서 사랑하는 자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필시 거기에는 그에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무엇인가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묻기 시작할 때 그들의 소망도 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리스도를 찾는, 한 사람의 특별한 열심히 ‘많은 사람들을 격동케’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고후 9:2).

(2) 신부는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녀는 한마디로, 그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사람 중의 하나이며 누구라도 비견할 수 없다고 그들에게 단언한다(10절). 그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이 다 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이것은 그가 현신하였을 때 육체의 뛰어난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얘기한 것이 아니고, 신령한 것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눈이 열린 사람들에게는 그의 거룩하신 영광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에게서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거룩한 아기 예수’인 것이다. 이것이 그의 아름다움이다. 그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그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의 생애는 흠없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희고,’ 피흘리는 고통 중에 죽었기 때문에 ‘붉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영광 중에 계실 때에 희었고 인성을 가지고 오셨을 때에 붉었다. 아담은 붉은 땅이라는 뜻이다. 그에게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사랑이 있다. 따라서 이렇게 표현되었다. 만 사람에 뛰어난다. 여기서 신부는 그의 성품에 대하여, 그의 권세나 아름다운 부분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녀는 그의 아름다움을 열 가지로 표현한다. 이 말을 하는 의도는 그가 자신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모든 면에서 다 조건을 갖추고 있고 또 그가 우리의 존경과 사랑과 확신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그리스도의 형상(계 1:13)과 신부가 여기에 기록한 형상과는 비교해 볼 만하다. 두 사람의 표현들은 모두 그가 만물 중에 뛰어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1) 머리는 정금같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고전 11:3). 그리스도의 머리라 함은 물을 주관하시는 주권을 의미하며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는 생명의 권세를 의미한다.

2)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까마귀에게는 검은 것이 아름다움이다. 검고 고불고불한 것은 그가 항상 젊다는 것, 곧 그에게는 늙어서 색이 바랜 것이라고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같은데. 이것은 아름답고 깨끗하며 정숙하고 온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 뺨은 향기로운 꽃밭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영혼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것의 반만 하더라도 가장 아름다운 꽃이나 향기보다 훨씬 기운을 북돋워 주고 소생시키며 향기로운 것이다.

5) 입술은 백합화같고. 이것은 달콤하고 기분좋음을 의미한다. 모든 성결한 성도들에게는 그의 입술의 말이 그렇게 여겨진다. 은혜가 그의 입술에 임하사 그를 듣는 사람마다 그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게 된다.

6)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같고. 황옥은 매우 진귀한 보석이다(14절). 고귀한 사람은 그 손에 손가락마다 진귀한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 노리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신부의 눈에는 그의 손 자체가 황금 노리개로 보였다. 그의 권세의 역사나 그의 손이 하는 일, 그리고 그가 은혜와 섭리로써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무도 황금이나 마노 혹은 사파이어 같은 진귀한 것이며, 당초 예정된 목적에 한치도 어긋남이 없고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같이 아름다운 것뿐이다.

요한계시록 1장 설교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7)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이것은 신부에 대한 그의 부드러운 열정과 사랑을 뜻한다. 그의 사랑은 빛나는 상아와 같아서 아름답게 광택이 나며 청옥으로 화려하게 입혀진 듯하다. 그 사랑 자체가 강하고 확실하며 빛나며 반짝이는 것이다.

8)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같고(15절). 이것은 그의 안전성과 확고함을 의미한다. 그는 자기의 어깨 위에 어떠한 정사나 권세도 올려 놓을 수 있다.

9)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레바논은 문자 그대로 언덕, 즉 그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면모를 의미한다. 그것을 백향목과 같이 뛰어난 것이다.

10) 입은 심히 다니(16절). 그것은 문자 그대로 달콤하다. 그의 입술의 말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달콤한 것이 된다. 그의 사랑의 증표는 그 자체가 아주 달콤하여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즐거운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그가 가장 귀중한 분이시다. 신부는 결론적으로 확고한 믿음과 소망을 단언하고는 이로써 자신의 고통을 통회한다. 여기에 우리 주 예수의 완벽한 아름다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고백이 나온다.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또한 그녀가 그에게 품고 있는 사랑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여기에 나온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갈구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 그는 나으리 것이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복음의 언약이라는 대의에서도 나의 것이고 모든 관계에 있어서도 내게 주어진 것이며 나의 모든 것이 되시며 나의 불쌍한 영혼이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승리의 기분으로 말한 것이다. “그는 내가 선택한 분이며 나의 모든 것을 바친 분이라. 그리스도 이외엔 어느 누구도 안되며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그럴 만한 분이시라. 그는 나의 온 마음을 가지셨는데 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이라. 그는 내가 믿는 분이시며 그에게서 모든 선한 것을 기대하노라. 왜냐하면 그는 내 친구이시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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