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 헬라어 원어성경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회개하라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천국 복음을 선포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다. 우리도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성 경: [마4:12] 아쿠사스 데 호 이에수스 호티 이오안네스 파레도데 아네코레센 에이스 텐 갈릴라이안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의 사역의 시작]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 ‘요한의 잡힘’에 대한 상세한 내력은 14:1-12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결심했을 때를 가리키는 대략적 시점을 표시하기 위해 세례 요한의 체포 사실만이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들으시고'(아쿠사스)는 ‘들었기 때문에’라기 보다는 ‘들었을 때’를 의미한다. 전후 문맥으로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히기 전 얼마동안 유대 지방에 머무시면서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회개에의 메시지를 전파하고(17절;막 1:15), 세례를 베풀었다(요 3:22). 그러나 세례 요한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예수의 사역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되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마태는 요한이 투옥된 때부터 예수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 같다.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 ‘물러가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코레인’은 종종 위험에 직면했을 때의 두려움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에서는 어떤 위기의식에 따른 장소적 이동과 한적한 곳에서의 ‘은거'(隱居)를 동시에 의미한다. 그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는 분봉왕 헤롯 안디바스가 다스렸던 곳으로, 예수의 고향 동네이자 멸시받고 소외된 지역이었기에 선교지로, 또한 은신처로 적합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유대의 중심지인 예루살롑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의 갈릴리'(15절)에서 시작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갈릴리 – 팔레스틴의 가장 북쪽에 있는 지방으로 히브리어로는 ‘고리’, ‘주변’을 의미한다. 가나안 정복후 갈릴리 지방은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에 분배되었다.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에게 성전 건축 자재들을 공급한 대가로 갈릴리의 성읍 20을 준(왕상 9:11) 이후로 이 지방은 앗수르(왕하 15:29), 바밸론, 바사(Persia), 마게도냐, 애굽, 수리아에 의해 차례로 정복되고 포로와 이민족의 이주가 되풀이 되어 혼혈 인종, 혼합 문화를 형성하였다. 또한 지중해 연안 지방에 널리 유행하고 있던 혼합 종교들과 제사가 갈릴리 지방에 유포(流布)되어 유대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로 불렸으며, 따라서 갈릴리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지 못할 것이라고(요 7:41, 52) 여겨져 왔다.
성 경: [마4:13] 카이 카탈리폰 텐 나자레트 엘돈 카토케센 에이스 카페르나움 텐 파라달랏시안 엔 호리오이스 자불론 카이 네프달레임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의 사역의 시작]
나사렛을 떠나…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 본절에는 이 일에 대한 동기가 분명치 않으나 누가복음에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배척한 때문인 것으로 되어 있고(눅 4:29-31)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갈릴리 정착에 대한 이유로 갈릴리 사람들의 영접(요 4:45)을 들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가버나움에로의 이거(移居)는 예수의 사역 목적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가버나움이 갈릴리 해변의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며, 동방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무역 통로에 위치하여 예수의 사역에 용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은 바로 참빛을 절대 필요로 하는 흑암의지대로서 예수 선교에 있어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의 갈릴리 선택은 유대인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일로 비쳐졌으며 그들의 눈에는 메시야 사역의 최적지(最適地)가 유대 땅 특히 예루살렘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가 가버나움으로 이거함로써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옛 지경(地境)과 관련된 예언이 성취되었으며(15, 16절), 예수의 이중 사역, 즉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야적 사역(눅 4:18, 19)에 갈릴리 지방이 더 적합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가버나움 – 신약에만 나오는 곳으로서 ‘나훔의 동리’라는 뜻이나 구약의 선지자 나훔과 관련이 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이 성읍의 소재(所在)에 대해서 전에는 ‘칸 민예'(Khan Minyeh)라고 생각되어 왔으나(Stanley, Carr) 1931년의 유적 발굴 결과 아랍인이 지은 우마야드(Umayyad) 궁전의 폐허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가버나움은 칸 민예에서 4km 정도 북동쪽에 위치한 ‘텔 훔'(Tell Hum)으로 인정되고 있다(Thomson, Robinson). 이곳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 해안에 위치하여 어업이 번창하였고, 동서 상업로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이곳에 세관이 있었고(막 2:14)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마 8:5-8). 또한 가버나움은 예수의 제자 중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이었고(8:14;막 1:29), 본서의 저자인 마태도 이곳이 고향인 듯하다.
성 경: [마4:15] 게 자불론 카이 게 네프달레임 호돈 달랏세스 페란 투 이오르다누 갈릴라이아 톤 에드논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 사역의 시작]
스불론 땅과…갈릴리여 – 여기서 영토의 범위를 표시하는 5개의 고유 명사들은 ‘백성'(호 라오스)과 동격으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들은 과거에 혹독한 압제와 재난을 당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적, 사회적인 속박에서 해방되어 큰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 중에, ‘스불론’과 ‘납달리’는 그곳 각각의 지명을 강조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상(上) 갈릴리’ ‘하(下) 갈릴리’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해변길'(호돈 달라쎄스)이란 70인역(LXX)의 사 9:1 에 언급된 표현으로서 히브리어 ‘데레크 얌’ 곧 ‘바다쪽으로’란 말을 축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다로 가는 길’이라기보다 ‘바다 옆’ 곧 갈릴리 해안 지대로 보는 것이 좋다(Turner). 그리고 ‘요단 저편’이란 갈릴리 동쪽 해안 지대로서 앗수르 침공시 납달리가 곤혹을 치렀던 곳이다(왕하 15:29).
성 경: [마4:16] 호 라오스 호 카데메노스 엔 스코테이 에이데 포스 메가 카이 토이스 카데메노이스 엔 코라 카이 스키아 다나투 포스 아네테일렌 아우토이스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의 사역의 시작]
흑암에 앉은 백성 – ‘백성'(호 라오스)이란 말은 ‘나라’, ‘이방인’을 의미하는 ‘타 에드네’와 구별되어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15절에 언급된 지방에 ‘앉은'(히브리어적 의미로는 ‘행하던’으로 볼 수 있다) 백성들, 즉 멸시받고, 영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갈릴리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스라엘의 영토 중 ‘흑암의 지경에 행하던’ 땅, 곧 종교적, 정치적 이점(利點)이 없는 가장 어두운 지역이 이제는 참 빛이신(요 1:9)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흑암’이라는 말은 ‘빛’, 즉 ‘하나님의 진리’의 부재(不在)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것은 참 복음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그들이 놓여 있던, ‘사망의 땅과 그늘’이 드리운, 곧 죽음과 절대 절망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소망이 무너진 상태에 ‘앉아'(카데메노스. ‘계속적으로 거주하며 살다’는 뜻) 절망 속에 헤매었으나 자신들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그러한 흑암 속에서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말 4:2) 그들에게 빛을 비추었던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비취다'(아네테일렌)는 ‘특별한 예언에 따라 특정한 지역에서 제일 먼저 찬란히 빛났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참빛이 다른 지역에서가 아닌 ‘이방의 갈릴리’에서 제일 먼저 눈부시고 아름답게 ‘발'(發)했다는 뜻이다. 유대인의 형식주의와 율법적인 의의 빛이 폐기되어 버리고 본래의 참 빛(요 1:9)이 높이 솟아 가장 어두운 곳을 가장 먼저 가장 찬란하게 비추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4:17] 아포 토테 에륵사토 호 이에수스 케륏세인 카이 레게인 메타노에이테 엥기켄 가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의 사역의 시작]
이때부터(아포 토테) – 본서에 세 번 발견되는(16:21;26:16) 이 용어는(눅 16:16) ‘특별한 시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예수 생애의 주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전에 유대에서 활동하셨지만) 갈릴리에서 본격적이고도 지속적인 그의 공적사역을 이제 드디어 시작하신 것이다.
전파하여(케륏세인) – 이 용어는 본래 전령자, 또는 선구자(케류스)의 역할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전파하다’, ‘선언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지식에 대한 설득, 토론이나 또한 어떤 유(類)의 논쟁이나 공격을 허용하는 이론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도래하는 천국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이며,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명하시는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지체 없이 전하는 것이다. 한편, 말씀(로고스)과 진리(알레데이아, 요 14:6)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전령자'(케류스)가 되셔서 전파하심으로 세례 요한의 그것(3:1)과는 달리 그 가르치시는 것이 더욱 권세를 지니게 되었다(17:29).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선포(3:2)와 동일하다. 그러나 요한의 선포 내용이 구약적 맥락과 관련하여(사 40:3) 자신이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한 선구자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임에(3:2-12) 비하여 예수의 선포는 자신이 바로 메시야로서 이방의 갈릴리에 큰 빛을 비출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사 9:1,2)의 성취라는 사실과 연결되고 있다(Schweizer)는 점에서 그 내용상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부언하자면, 요한의 ‘가까이 온’ 천국은 아직도 미래적인 것에 그친 반면에 예수의 천국은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깃들어 있고(Auto Basileia, Origen), 그의 인격이 곧 실현된 왕국(C. H. Dodd)이며, 그의 메시지와 행동이 곧 생동하는 신국의 표징(M. Dibelius)이라는 측면에서 ‘가까이 왔고'(엥기켄), 또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인류에게 진정한 구원과 천국 기쁨을 허락하사 당신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이 이제 곧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요한은 모세가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그는 천국의 실체를 단순히 소개하고 전파하는 역할만을 수행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계승하여 그 백성들을 축복의 땅으로 인도한 것처럼 갈릴리 전 지역으로 자신의 사역을 확대하여 천국의 실체를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의 천국 선포를 인계하여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편만(遍滿)해 있던 사단의 왕국을 친히 물리치시고(11절), 또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각종 이적을 행하시는 가운데 사단의 세력을 정복해 가심으로써(눅 10″17-20) 이 땅에 천국이 현재적으로 도래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물론 이러한 현재적 천국은 죽음(사단)의 권세를 꺾고 이 땅에 생명의 축복을 부여하신 십자가, 부활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막 1장 강해, ‘하나님의 나라 개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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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블로그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