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장 설교문은 여리고의 두 맹인 치유 사건에 대해서 말씀한다.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 두 맹인이 길가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소리를 쳤다. 예수님은 두 맹인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고쳐주셨다. 성도는 영적인 맹인이 되면 안 된다.
Ⅱ.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예고하심 20:17-19
그리스도께서 다가오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신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1. 이 예언의 은밀성(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친구로서 그에 대한 비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지만 만일 어느 누구든 그것을 받을 수 있다면 제자들도 그것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리 경고를 받아야 미리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므로 제자들이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말을 하기에는 아직 적합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였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그에게 등을 돌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를 열심히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들을 경우 그리스도를 지키려고 주장을 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민요(마 26:5)를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결코 묵과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예언의 내용(18,19)
(1) 이 내용은 그가 전에 16:21과 17:22,23에서 두 번이나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앞에 어떤 고난이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 아신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의 관심이 그의 고난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까지도 암시하고 있다. 고난은 그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희망과 기대감을 주었다. 그가 이처럼 자신의 고난에 대해 자주 말씀하시는 것은 그가 그 고난을 통하여 그의 영광에 들어가실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는 여기서 그의 고난에 대한 예언을 다른 때보다 더 상세하게 말씀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16:21절에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본문에선 ‘저희가 죽이기로 결한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라’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다. 그가 자신의 고난에 대해 더 분명하게 예언하시면 하실수록 그는 고난을 더 기쁘게 맞으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전에 말씀하셨듯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예언하신다. 그러나 본문에는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주어’라는 말씀이 첨가되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해야 하셨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에 관여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해시키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엡 2:16)
(3) 전과 같이 이 본문에서도 그는 자기의 죽음과 고난을 자기의 부활과 영광에 관련시켜서 말씀하신다.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19절). 그가 여전히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그의 고난에 대해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굳게 하고 그 고난을 기쁘게 수행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히 12:2). 그는 자기가 다시 부활해야 한다고 예언하셨다. 그것도 제 삼일만에 부활해야 한다고 예언하신다. 그가 당하실 고난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게 주어질 뿐 아니라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주어진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그의 제자들은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현세의 모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고난을 가볍게 여기고 그 고난을 잠시 동안만 받는 것으로 여기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그릇된 야망을 바로 잡아 주심 20:20-28
본문에는 먼저 그리스도인에 대한 두 제자의 요구가 나온다(20-23절).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와 이들 두 명은 그리스도께서 총애하시는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이 특히 사랑하셨던 제자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들 만큼 자주 책망을 받았던 사람들도 없었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장 많이 책망하시기 때문이다(계 3:19).
1. 야고보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구한 야심적인 간청(20,21)
그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신뢰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지만 그들이 여전히 그의 왕국을 세상적인 화려함과 권세를 가진 일시적인 왕국으로 기대했던 것은 그들이 너무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간청을 통해 고관이 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고용되는 것을 간청하기보다는 오히려 명예만을 요구했다. 아마도 그리스도가 앞서 하신 말씀 가운데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한 마지막 말씀으로 인하여 그들이 이런 요청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을 이처럼 남용해 버렸다.
어떤 사람은 위로를 받을 수도 없지만 위로를 받는다 해도 그 위로를 도리어 악한 목적에 사용해 버린다. 이는 마치 달콤한 음식이 상한 위 속에서 담즙을 내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이 간청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계획을 했다. 곧 그들은 그들의 모친으로 하여금 이 간청을 하도록 했으며 그 간청이 그들의 간청이 아닌 그녀의 간청으로 여겨지도록 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리스도의 시중을 들면서 그를 섬겼던 여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녀의 간청을 거부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녀를 그들의 대변자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들의 모친은 마음이 약했기 때문에 이처럼 그들의 야심을 채우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은 그릇된 호의를 베푸는 모의에 끼이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비를 구할 경우 은혜의 보좌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기도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하는 친구들로 하여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도록 간청하며 그 기도를 참된 호의로 여겨야만 한다. 야고보와 요한의 이 요구 속에는 그들의 교만이 깔려 있었다. 교만은 우리를 가장 괴롭히기 쉬운 죄로서 없애기 힘든 것이다. 은혜와 경건을 얻고자 다른 사람들을 앞지르려는 것은 경건한 열심히 된다. 그러나 허세와 위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앞지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죄로 가득찬 야망이 되는 것이다.
2. 이 간청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22-28)
그리스도는 이 대답을 그 어미에게 하신 것이 아니고 그녀를 부추겼던 그 아들들에게 하셨다. 그는 그들의 간청이 너무 무지하며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셨다. 너희는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22절). 그들은 그들이 지켜보았던 그 왕국에 관하여 너무 무지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오른 쪽에 앉는 것과 그리스도의 왼쪽에 앉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눈먼 자들이 색채에 대해 말하듯 그 왕국에 대해 말했던 것이다.
우리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영광의 뜻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어린 아이가 장성한 어른들의 우선권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불완전하다. 그것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에 대해선 눈으로도 볼 수 없고 귀로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 왕국에 이르는 방법에 관하여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으며 또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구하고자 하는 것에 이르는 방법을 간과해 버리고 말았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을 때 그들의 모든 봉사와 고난이 이미 끝났으며 이제야말로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될까요”라고 물어야 할 때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의 전투가 막 시작되었을 때 그 승부가 이미 결정되어 보병과 함께 목적지까지 달리기만 하면 된다고 상상했다. 우리가 면류관을 쓰는 영광을 구하면서 그 영광에 이르는 길 속에서 십자가를 지는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들의 요청 속에 담겨있는 허영과 야망을 억제하시는지 살펴 보자.
(1) 그리스도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당하게 될 고난을 생각하게 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그 고난을 명심하고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이 고난으로 말미암아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도록 그들 앞에 놓여있는 고난에 대해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이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 보자.
1) 그리스도는 고난에 대한 문제를 제자들에게 얼마나 명백하게 말씀하셨는가.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너희들이 끝까지 고난을 견딜 수 있느냐?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그들은 그들이 야망에 부풀어 있었을 때 그들의 생각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서 우리가 스스로 식별하지 못하는 교만을 보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바로 잔을 마시는 것이며 세례를 받는 것임에 주목하라. 그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짜낸 물이 가득한 쓴 잔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시 73:10). 그리고 그 고난은 고통의 물로 씻는 세례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의 물 속에 잠겨서 세례를 받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약간 뿌려진 물로 세례를 받기고 한다. 대홍수를 만난 사람처럼 흠뻑 젖은 사람들이나 갑작스런 소나기를 만난 사람처럼 보기 흉하게 젖은 사람들이나 모두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속에서 위로가 더 넘치게 된다. 고난이 비록 쓰긴 하겠지만 한 잔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 잔이 비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 잔이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들린 잔이기 때문이다(요 18:1). 그리고 고난은 하나의 세례에 불과하다. 비록 최악의 경우 물 속에 잠긴다해도 익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황하는 일이 있어도 절망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마셨던 것과 같은 잔을 마시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것과 같은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①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주신 그런 잔을 마시고자 하셨으며 또 그런 세례를 받고자 하셨는데 이는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②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쓴 잔으로 그리스도에게 맹세하는 것은 그들에게 위로가 된다. 우리가 종종 이런 잔을 마실 수 있으며 이런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자문해 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우리는 고난받을 것을 각오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고난을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내줄 수 있을까? 진정 종교가 어떤 일에 가치를 나타낼 경우, 모든 일에 가치를 나타낸다 할지라도 그 종교로 인하여 고난당할 가치가 없다면 그 종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제 앉아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에 대한 대가를 계산해 보자. 그리고 이런 조건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을지 물어 보자.
2) 그들은 얼마나 대담하게 그들의 능력을 보증하고 있나.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말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결코 시험받지 않기를 분별없이 바라고 있었다. 그들이 전에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지금 그들은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가장 적에 알고 있는 자들이 의례히 가장 대담한 법이다.
3) 그들의 고난이 여기서 얼마나 명백하고 단호하게 예언되었는가. 그리스도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실 것이다’고 예언하셨다. 그러나 그 고난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예언된 고난을 한결 쉽게 감당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천국에 이르는 길에 순응하도록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을 알게 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너희가 마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2) 그리스도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영광을 알지 못하게 하신다. 그들이 기꺼이 그들의 고난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은 그들에게 그의 왕국에서 얻게 될 처소를 확신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것은 천국의 가장 낮은 자리라도 세상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한 대가로 받는 보상으로서는 넘치는 보상이 되기 때문이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는 그것을 구하거나 알려 하지 말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는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곧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그것을 찾고 갈망하는 자들에게 줄 나의 것이 아니라 매우 겸손하고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그것을 예비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3.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개한 열 명의 제자들을 꾸짖고 가르치심(24-28)
(1) 열 명의 제자들이 느꼈던 불쾌감 :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24절). 이것은 두 형제가 높은 지위를 원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열 명의 제자들이 두 형제보다 높은 지위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보고 분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 죄가 죄라서라기보다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 제자들은 비록 그들이 야심을 갖고 있었다 해도 아니 그보다는 그들이 야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형제가 갖고 있었던 야심에 대해 분개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자신에게 허용하고 자신이 열중했던 죄들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할 경우 그들에게 화를 내게 된다. 그러므로 야심만큼 친구들 가운데서 더 많은 잘못을 범하게 하거나 분개와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것도 없다.
(2)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불만을 억제하셨다. 그는 전에(마 18:3) 바로 이런 죄를 책망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 죄를 다시 범하고 말았으며 그리스도는 그들이 범한 죄를 이처럼 부드럽게 책망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주 다정하고 친근하게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는 화를 내시면서 그들이 그에게서 떠나도록 명령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불러 그에게 오도록 하셨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1) 그들이 이방인의 집권자들을 닮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방인을 닮는다는 것은 말도 안될 일이다. 이제 다음의 내용들을 살펴 보자.
① 이방인의 집권자들의 취하는 태도(25절) :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그들의 신하들에게 통치권과 권세를 행사한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런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들이 위대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며 또 그런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② 이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뜻 : 이에 대해 그리스도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하신 것이다. 곧 “너희는 이 나라의 신하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수고하여 그들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벧전 5:3)로 하지 말고 그들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세로 해야 한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취하는 위엄과 허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해가 된다. ③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취할 태도 :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 중에 큰 자가 되는 방법을 친히 나타내 오셨으며 여기에서 그것을 설명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6, 27절). 상호계발을 위하여 서로가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의무다.
이 의무에는 겸손과 유용성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이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품위이다. 따라서 크고 으뜸이 되는 방법은 겸손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가장 겸손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선을 행하는 일에 온 힘을 쏟는 사람들은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은 존경을 받게 된다. 현명해지고자 하는 자는 바보가 되어야 하듯이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그들은 그들의 선생을 닮아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절). 우리 주 예수님은 앞에서 권했던 두 가지 일 곧 겸손과 유용성의 본보기로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셨다.
①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오신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그가 보여주신 것 가운데 겸손보다 더한 것은 결코 없었다. 그는 진정 가난한 사람으로서 섬김을 받으셨지 위대한 사람으로서 섬김을 받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의 발을 씻어 드렸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오신 것이다. 그는 스스로 그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종처럼 병든 자들을 돕는 종이 되어 항상 그들의 요구에 응했으며 또한 그들을 섬기기 위하여 상당히 큰 고통을 겪었다.
②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그가 보여주신 것 가운데 긍휼과 유용성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그는 종으로 살면서 선을 행하기 위하여 돌아다니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희생 제물로 죽으심으로써 모든 선 가운데 가장 큰 선을 이루셨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는 자기의 명예와 생명까지도 자기의 백성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었다. 그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주셨는데 그 대속물은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도 충분할 뿐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을 대속하기에 효과적인 대속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련하게도 의심이 많은 사람은 “그가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라면 그는 왜 나를 위한 대속물이 되지 않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가 우리의 군기이며 또한 우리 주님의 죽음이 곧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으뜸이 되려고 다투어선 안된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비하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혜택을 얻게 되며 또 그것을 모방하가 위하여 더욱 준비를 하고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Ⅳ. 소경을 눈뜨게 하심 20:29-34
1. 그리스도에 대한 두 소경의 간청(29-31)
(1) 간청을 하게 된 상황이 주목할 만하다. 이 일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 일어났다. 여리고는 저주 가운데서 재건된 신앙적인 곳으로서 그리스도는 이 곳에 축복을 베풀고 떠나셨다. 그리고 그 일은 그를 좇던 큰 무리 앞에서 행해졌다. 그리스도는 큰 무리를 거느리고 다니시면서 그들에게 선을 베푸셨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좇았던 이 무리 속에는 온갖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떡을 구하기 위하여 그를 좇았던 사람도 있고 사랑을 구하기 위하여 그를 좇았던 사람도 있으며 호기심 때문에 그를 좇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자기의 의무를 배우기 위하여 그를 좇았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소수의 사람들을 위하여 큰 무리 앞에서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그의 교훈을 확증시켰다. 두 소경은 힘을 합하여 그리스도에게 간청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합심 기도를 기뻐하기 때문이다(마 18:19). 같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도 동반자들이 되는 것이다. 같은 재난을 당했거나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불구가 되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열정을 자극하고 서로의 믿음을 격려할 수 있도록 협력하여 하나님에게 구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스도에게는 모든 청원자들에게 베풀 자비가 충분하게 있기 때문이다. 이 소경들은 길가에 앉아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다니시는 길에 앉아 있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두 소경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게 되었다. 비록 그들이 소경이긴 했어도 귀머거리는 아니었다. 보고 듣는 것은 모두 배우기 위한 감각들이다. 그들은 볼 수 없는 소경들이었지만 귀로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알았다. 그러나 두 소경은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기를 원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자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곧 바로 소리질렀다. 현재의 기회를 활용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이 소경들은 바로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현명하게 활용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다시 여리고에 들르셨다는 기록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이 받을 만한 때이다.
(2) 두 소경의 간청 내용이 더 주목할 만하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30절). 그들은 이 말을 31절에서 다시 반복하여 사용했다. 두 소경의 간청 속에서 우리는 칭찬할 만한 네 가지의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1) 끈질긴 기도 : 그들은 가장 열성적인 사람들처럼 소리를 질렀다. 부족을 느낀 사람들이 가장 열성적으로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생각으로만 바라는 것은 거절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창피를 당했을 때 더 큰 소리를 질렀다. 열정의 흐름이 중단되면 그 열정은 더 높이 불어나는 법이다. 이것은 곧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자비를 받기에 더 합당한 자가 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기도로 말미암아 더 많은 보상과 인정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겸손한 기도 : 그들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말을 통하여 그들이 받고자 하는 긍휼을 구체화시키거나 그것을 어떤 것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쌍히 여기소서’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그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은과 금을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자비만을 구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
3) 믿음에 의한 기도 : 그들은 그리스도를 불렀을 때 애원하는 투로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 고백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 곧 매우 친절하고 다정하신 분으로 예언된 메시야로 부름으로써 그의 선으로부터 용기를 얻었던 것처럼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권능으로부터 용기를 얻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메시야직의 은혜와 영광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유익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돕고 구원하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특별한 유익이 된다는 것이다.
4)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는 기도 :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31절). 우리는 기도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를 때 장애물과 가지각색의 실망을 만나게 될 것에 대해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믿음과 열정, 인내와 오래 참음이 연단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그런 책망들은 허용되고 있다. 이 불쌍한 소경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좇았던 무리들에 의해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긍휼을 구하면서 무리들이 말하는 대로 잠잠하게 있기를 원치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더욱 소리질렀다. 따라서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눅 18:1)하는 것이다.
2. 두 소경의 간청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32-34)
무리들이 그들을 꾸짖었으나 그리스도는 오히려 그들에게 용기를 주셨다. 만일 주께서 무리들보다 더 친절하며 다정하지 않으시다면 그것은 우리들보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겸손한 자들이 넘어져서 당황하도록 하지 않으실 것이다.
(1)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32절).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이었지만 이 소경들을 치유해 주시려고 머물러 섰던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어떤 일을 서둘러야 할 때라 하더라도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머물러 서야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두 소경을 부르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황금홀을 내밀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끝을 잡으러 나오라고 명령하신다.
(2) 주님은 그들의 처지를 더 자세하게 물으셨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3절).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낸다. “내가 여기 있으니 너희가 얻고자 하는 것을 내게 말하라. 그러면 너희가 그것을 얻으리라.” 우리가 무엇을 더 원하고 있는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 7:7).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 질문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일반인으로부터 자선을 구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아니면 메시야로부터 그들의 병에 대한 치유를 받고자 하는 것인지 잘 알고 계셨지만 그들로부터 그것에 대해 직접 듣기를 원하셨다. 해안에다 갈고리로 배를 매둔 어부는 배 안에서 그 갈고리를 통하여 해안을 배가 있는 곳으로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니고 해안 쪽으로 배를 끌어 당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비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자비를 얻기 위하여 기도로써 매달려야 한다.
두 소경은 곧바로 그들의 요구를 그리스도에게 말했다.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는 우리 몸의 욕구와 부담을 빨리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또 그것을 쉽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 질병을 걱정하고 또 그 질병을 절실하게 한탄할 수 있다면 특히 우리의 영적 소경을 한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주여, 우리 마음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우리의 무지를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곧 그리스도께 의지할 것이다.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 주님은 그들을 치유해 주셨다. 그가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한 하나의 실례가 되었다.
1) 주님의 긍휼 :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34절). 불행은 자비의 대상이다. 어둠 속에 앉아 있던 두 소경이 빛을 보게 된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눅 1:78,79).
2) 주님의 권능 : 그는 그들의 눈을 쉽사리 고쳐 주셨다. 그는 단지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눈을 효과적으로 고쳐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곧 보게 되었다.’ 또한 이들 소경들은 시력을 얻고 ‘예수를 좇았다.’ 그리스도를 맹목적으로 좇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먼저 은혜를 베풀어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신 뒤 그들의 마음을 그에게로 끌어 당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