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4장 성경말씀] 성령의 은사인 방언과 예언

14장: 방언과 예언

1-19절, 예언이 방언보다 나음

[1절] 사랑을 따라 구하라[사랑을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사랑은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사랑의 덕을 구하고, 그것을 가진 자로서 신령한 것, 곧 성령의 은사들을 구하라는 뜻이다. 사도시대니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가르친 줄 안다. 만일 그가 오늘날 교훈한다면,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고 성경으로 권면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다(눅 16:29-31; 계 22:18-19). 바울은 그들에게 영적 은사들을 사모하되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한다. 방언보다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은 본장 전체의 요지이다. ‘예언한다’는 원어(프로페튜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물론 때때로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豫言)도 포함한다.

[2절] [이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방언을 말한다’는 말(랄론 글로쎄)은 ‘방언으로 말한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를 가리킨다. 본문은 왜 방언보다 예언을 하려고 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4절까지 반복된다. 즉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내용을 ‘비밀’이라고 말한 것은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그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4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예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덕을 세운다’는 원어(오이코도메오)는 ‘(집을) 세운다’는 말로서 ‘영적 유익을 준다(edify)’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교훈과 권면, 위로와 격려 등 영적 유익을 준다. 방언은 자기와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자기에게만 유익하지만, 예언은 다른 이들의 신앙 지식과 인격과 생활에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교인들의 유익을 생각할 때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보다 예언을 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방언들]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이는](전통사본)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사도시대에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다 방언들로 말하기를 원하지만, 그보다 그들이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바울이 그들이 방언들로 말하는 것보다 예언하기를 원하는 까닭은, 방언들로 말하는 자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통역하지 않으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예언하는 자가 그보다 더 크다”라고 되어 있다. 예언이 통역 없는 방언보다 더 큰 은사라는 뜻이다.

[6-9절]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바울은 만일 자신이 고린도교회에 가서 방언으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교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고 묻는다. 이와 같이 통역 없는 방언이 예언보다 가치가 적다는 것은 분명하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필요한지 예언하는 것이 필요한지 그 답은 분명하다.

심지어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 없는 악기들도 그것들의 독특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것이 피리인지 거문고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또 나팔소리도 다양한 신호의 역할을 한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은 광야생활을 할 때 나팔을 통해 모이라고 알리기도 하였고 앞으로 진행하라고 알리기도 하였다. 또 나팔은 적의 침입을 알리는 신호의 역할도 했다. 나팔의 소리에 따라 그 의미가 달랐다. 이와 같이 성도가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다. 아무리 방언을 잘해도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한다.

[10-12절]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소리들이 있지만 의미 없는 소리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내게 무슨 말을 했을 때 내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나는 내게 말하는 그에게 야만인이 되고, 내게 말하는 그 사람도 내게 대하여 야만인이 될 것이다. ‘풍성하기를 구하라’는 것은 교회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지 말고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기를 구하라는 뜻이다. 그것이 교회의 영적 성장, 영적 건립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훈은 분명하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사모하였으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이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 곧 다른 이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중요하다.

[13-14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누스)[생각, 지성, 이해력]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방언과 예언에 대해 설명했기 때문에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자신의 방언을 통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통역하지 못하면, 교회에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은 통역하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다른 이들에게 어떤 교훈이나 권면이나 위로가 되었다. 이와 같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의 활동이기는 하나 마음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방언은 하나님의 영께서 성도의 영을 직접 사용하셨던 현상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성도의 영의 활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성(知性)은 방언의 내용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의 마음이 열매를 맺히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15-17절]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찬미]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영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는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지성으로 이해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한다. 어떤 이가 방언으로 찬미하고 그것을 통역하지 않으면, 성도는 그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다. 그는 감사를 잘했을지라도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방언에는 반드시 통역이 필요하였다.

[18-19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그러나 나는 교회에서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생각을 가지고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여러 나라 언어들로 말할 수 있었음을 감사했다. ‘깨달은 마음으로’라는 원어(디아 투 노오스)는 ‘생각을 가지고, 이해력을 가지고’라는 뜻이다.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한다’는 원어는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한다’는 뜻이다. ‘낫다’는 원어(델로)는 ‘원한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것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방언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그 둘의 가치의 차이는 ‘다섯 마디의 말’과 ‘일만 마디의 말’의 대조로 완전히 분명해진다. 교회에서는 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 말이, 생각을 가지고 하는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하다.

1절부터 19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면서 교회의 덕과 유익을 생각할 때 방언이 예언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또 그는 교회 안에서 방언이 가치를 가지려면 반드시 통역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에서는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생각을 가지고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낫다. 이 진리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오늘날에도 어떤 이들은 방언의 은사를 크게 여기며 사모한다. 그러나 방언의 은사는 신구약성경의 충만한 교훈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가치와 성경 읽기와 성경 공부의 중요성이다.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깨닫는 말씀, 그래서 남을 권하는 다섯 마디의 말은 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의 말보다 낫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귀한 선물인 성경을 힘써 배우고 이 말씀으로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여 교회를 굳게 건립해 나가자.

20-33절, 질서 있는 모임

[20절]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지혜’라는 원어(프렌)는 ‘생각,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본절은 생각과 깨달음에 있어서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한다. 악은 알아서 좋을 것이 없다. 악은 모를수록 좋다. 악은 경험해볼 필요가 없다. 사람 속에는 악의 경향성이 있으므로 악을 알면 알수록 악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생각과 깨달음에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생각은 사람의 인격을 이루며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한다. 잠언 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 사람 됨)도 그러한즉.” 생각이 어리면 미숙한 인격이지만, 생각이 성숙하면 성숙한 인격이다. 바른 생각, 깊은 생각, 원만한 생각, 완전한 생각은 성숙한 인격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생각에 있어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

[21-22절]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사도 바울은 이사야서를 율법이라고 불렀다. 율법은 구약성경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의 율법서나 역사서나 선지서나 시편은 권위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모든 책들이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책들이며 하나님의 말씀들이다(딤후 3:16). 또 사도 바울은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이며, 예언은 믿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방언을 구할 것이 아니고 예언을 구해야 하며, 믿는 성도가 방언으로 무엇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대단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신 은사이기 때문이다.

[23-25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교회에는 방언보다 예언이 있어야 유익이 된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지만, 예언은 사람의 죄를 책망하고 숨은 잘못을 드러나게 함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며 그를 경배케 만들 것이다.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지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이미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더욱더 하나님을 알게 할 것이다.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사도시대 교회의 집회 순서는 주로 찬송과 설교로 이루어져 있었다. 찬송시(프살모스 )는 시편 찬송을 가리킨 것 같고, ‘가르치는 말씀’이란 설교에 해당할 것이다. 계시와 방언과 통역도 교훈적 성격을 가진다. 계시와 방언과 통역의 순서는 사도시대에만 있었고 그 후 시대에는 없어진 순서들이다. 교회의 공예배의 순서들은 다 덕을 세우기 위해 행해져야 한다. 물론 공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영적 유익을 얻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집회는 사람들에게 유익도 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회개와 구원이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집회들은 이것을 위하여 유익한 모임이 되어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 것이다.

[27-28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교회 집회 시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있으면 두 사람이나 혹은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하며 한 사람이 통역하는 것이 좋았다. ‘다불과(多不過)’라는 말은 ‘많아도’라는 뜻이다. 그것은 한 집회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세 사람을 넘지 말라는 규정이다. 방언은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만 공집회에서 허용되었다. 만일 통역자가 없으면 교회의 공집회에서는 잠잠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말해야 했다.

[29-31절]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방언과 비슷하게, 교회의 공집회 시 예언도 둘이나 셋이 말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해야 했다. ‘분변한다’는 말은 참되고 그릇됨을 분별하고 판단함을 말한다. 예언은 한 사람씩 순서대로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권면을 받을 수 있었다. ‘권면한다’는 원어(파라칼레오)는 ‘위로하다, 격려하다’는 뜻도 있다. 권면과 위로를 통해 교회는 유익을 얻을 것이다.

[32-33절]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방언과 예언은 무질서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다. 교회의 집회는 질서 있는 집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지러움과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건건한 인격자는 무질서하지 않고 질서 있게 행동하며 또 그런 행동을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건전한 인격자이시다. 그는 질서를 원하신다.

창세기 1장에 증거된 창조 사역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우주와 인간의 한 신비는 그 질서정연한 법칙에 있다. 예수님께서도 떡 기적을 일으키실 때 사람들을 오십 명씩, 백 명씩 질서정연하게 앉히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도 질서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혼돈과 싸움을 버리고 질서와 화평을 존중해야 한다.

죄는 사람의 인격을 무질서와 혼란에 떨어지게 하였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지금 무질서하고 혼란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잘 살고 있고 자신들이 장차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면서도 용감하게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무의미 속에 살고 있으며 삶의 목적과 도덕적 판단 기준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주와 인생의 질서를 찾게 되며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 그리고 도덕적 판단 기준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생각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자. 악은 모를수록 유익하나 생각은 바르고 깊고 원만하고 온전할수록 좋다. 생각에 있어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과 덕이다. 사도시대의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주신 은사이며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해 주신 은사이므로, 교회에서는 예언이 더 유익하며 방언은 교인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통역되어야 했다. 또 교회의 공적 예배의 중요한 순서는 찬송과 기도와 설교이며, 특히 설교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였다.

셋째로, 교회의 공적 집회는 질서 있게 행해져야 했다. 교회의 공적 예배의 순서들은 질서 있게 행해져야 한다. 또 교회의 일들을 처리하기 위한 회의들도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34-40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너희의 아내들]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4절로 38절에서 바울은 아내들 혹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고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이 교훈에 대해 그는 몇 가지 점을 말한다. 첫째로, 이 교훈은 모든 교회에서 지켜지는 규례이다. ‘모든 성도의 교회’라는 말(파사이스 타이스 에클레시아이스 톤 하기온)은 ‘성도들의 모든 교회’라고 읽는 것이 옳다. 이 교훈은 모든 교회의 보편적 규례이다. 둘째로, 이 교훈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율법에 이른 것같이’라는 말은 이 진리가 율법 즉 성경에 근거하였다는 말이다.

[35-38절]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셋째로, 이 교훈은 인간의 생각이 아니고 ‘주의 명령’이다. 사도들의 모든 교훈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생각을 전달한 자들이 아니고 주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증거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교훈을 인간 바울의 생각으로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글의 교훈은 주의 권위로 증거된 것이다.

또 바울은 디모데전서 2:11-14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말했다(딤전 2:11-14). 즉 그는 인간 창조의 질서와 범죄의 징벌 때문에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을 금하였다.

[39-40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교훈한 것은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덕의 문제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중요한 주제이다.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26절에서는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했다. 사람의 영혼의 구원과 유익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이다. 그것은 곧 덕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의 구원과 유익을 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바울은 질서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말한다. ‘적당하게’라는 말은 ‘바르게’라는 뜻이다. 교회 생활에서는 질서도 중요한 한 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평화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모임과 활동은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여자들 혹은 아내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보편적 규례이며, 성경에 계시된 바이며, 또 주님의 명령이다. 이 교훈은 디모데전서 2:11-14의 말씀과 함께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 안수 금지에 대한 성경적, 사도적 지침이 된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한다. 사도 바울은 예언과 방언 문제를 다루면서 교회의 덕을 위해 예언하는 자가 되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3장 성경말씀 성령의 최고 은사인 사랑

셋째로, 교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무질서와 혼란은 교회에 해가 되지만, 남의 인격을 존중하는 질서는 교회에 평안과 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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